요즘은 버스로 편도 1시간 반을 이동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
서울에 잠깐 있었을 때, 경기권의 애들이 서울까지 오느라 1시간, 1시간 반 버스를 타고 다니는걸 보고..
어떻게 저렇게 아침일찍 일어나서 이 시간에 맞춰 오는걸까 의아해했는데..
그 비슷한걸 하게 됐다.

요즘은 새벽 4시 전후로 일어난다.
아침에 일어나서 1시간 회계공부를 하고, 5시반부터 부지런히 씻고 화장하고 옷을 입으면 7시가 된다.
그러면 부랴부랴 출근해서 8시 반까지 회사에 도착한다.

지난 한달 반동안은 평온한 일상을 보냈다.
대신 월급도 지난 회사에 비해 반토막이 났다.
이번에 느낀 것은.. 사람에게 워라밸이란 너무나 중요한 요소라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이가 적다는 것은.. 내가 무언가를 원할 때 사지 못한다는 것임을 뜻하는걸 배웠다.

지난 한달 반동안 야근다운 야근을 한게 손에 꼽았는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화장을 하고 출근을 하는게 이상하리만큼 힘들지 않았다.
회사에서도 항상 웃으면서 사람들을 대할 수 있었다.
가끔 내가 못하는 일 때문에 좌절을 하기는 했지만…

33살에 어쩌다보니 다시 막내로 돌아가는 생활이 되기는 했지만,
게다가 이제는 여기에 계속 있다면 잡일만 하다가 내 일생이 끝나긴 하겠지만..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방글방글 웃으면서 화장까지 매일 해가면서 회사를 다닐 수 있는 사람이었나..
새삼 놀라웠다.

6년 다닌 회사를 뒤로하고 나올 때, 새로 바뀐 팀장으로부터 ‘너 어디가서 그렇게 화내면서 회사생활하지 마라’라며 면전에다 대놓고 욕먹다가 얼마 안가서 퇴사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이직하고 3개월을 또 다닐 때, 매일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눈물로 잠들었던 적이 있어서 그런가..
기분이 이상했다..
한달 반동안 화가 이렇게 많이 안날 수 있다니..
오히려 방글방글 웃을 수 있다니.. 왜지..
아직 메인롤이 없어서인가..
하지만 단순히 그렇다기엔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은 되게 바빠보이는데도 큰소리를 안내면서도 사근사근하게 의사소통을 하는걸 보고 너무 신기했다..

참.. 내가 오래 산건 아니지만 별 일이 다 있네.. 싶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안다..
회사가 직장인에게 있어서 유토피아가 될 수는 없다.
분명 시간이 지날수록 본성이 드러나고야 말 것이다.
원래 초반 3개월은 허니문 기간이라고 해서.. 신입과 회사가 서로 탐색하는 기간이니까..


하지만 반면에 너무나도 작아진 월급을 보고 착찹한 마음도 들었다.
3년 전부터 너무나도 사고 싶었던 가방이 하나 있었다.
그 당시에는 퇴사 후, 얼마 안되던 시절이라, 마음이 조급했고, 어차피 사람을 만나는 것도 아닌데 당연히 미래에 대한 투자를 하는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오늘, 우연히 가방 가격을 찾아보다가.. 내 월급을 비교해보고 조용히 인터넷 창을 닫았다.
40만원조차 안되는 가격이었는데도.. 부담이 되어서 차마 결제를 할 수가 없었다.
참.. 한편으로는 착찹했다.. ㅎ


일에 대해서는..
예전의 일과 비슷한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다.
그런데 한가지 놀라운건.. 더이상 외국어를 쓸 기회는 아예 없다는거..
지난 한달 반동안 외국어를 쓸 일이 단 한번도 없었고, 이 자리는 원래 그런 자리라서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납득했고, 요즘 같은 세상에 감지덕지하며 다니고는 있지만..
어느날 우연히 회사 근처 무인 편의점에서, 내가 모르는 회사 정직원과 외국인이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걸 옆에서 보고 있자니, 갑자기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아무래도 아직은 포기가 안되나보다..
하긴.. 내 20대부터 30대 초까지 거의 10년동안 외국어는 내 취미생활이었는데.. 하루 아침에 포기가 되면 그게 이상한거겠지.. ㅎ

그나마 다행인건.. 칼퇴가 가능하니까 6시에 퇴근하면 근처 카페가서 밤 9시까지 공부하는게 하나의 낙이 되었다.
요즘은 어처구니없게도 전산회계 1급을 공부하는 중인데..
계기는 한국조폐공사 지원할 때, 가산점에 전산회계,세무가 들어가 있는걸 보고 충격 받기도 했고..
입사 첫 날에 우리 팀의 대빵으로부터 ‘자네 회계는 좀 할줄 아는가?’라는 질문을 받아서이기도 했다.
공부를 하는건 어떻게보면 진절머리가 나긴 하지만..
너무 친구없이 혼자였던 시간도 길었고..
회사에서 방글방글 웃으면서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고 나면.. 나 혼자 고요하게 지낼 시간이 절실히 필요한데..
아이러니하게도 공부가 위로가 되어준다.
적어도 책은.. 사람 뒷통수는 안때린다.
내용이 이해가 안되어서 내가 빡칠수는 있어도.. 내가 책의 비위를 맞춰주느라 신경쓸 필요도 없고..
책 앞에서는 굳이 내가 타인에게 긍정적인 척 안해도 되는 것도 좋고..
책은 언제라도 펴면 어색한 기류 하나 없이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기만 하면 된다는게 좋다.
그래서 요즘엔 그냥 내 본연의 모습으로, 책 내용이 이해가 안되면 빡쳤다가.. 이해가 되면 좋아하고.. 그러고 있다.
하.. 공부를 10년 넘게 하니까 이젠 이런 변태같은 지경에 이르렀네.. ㅎ
인생.. 참 모를 일이다.
나는 원래 공부하는게 싫었는데.. 근데 사회생활이 더 싫엉….. ㅠ

부모님은 가게를 내놓으셨지만 요즘같은 킹시국에 가게가 언제 넘어갈지는 요원한 상태이다.
그래서 주말 중 하루는 가서 작게나마 도와드리고 있다.
대체적으로는 회사 다니면서 일어나는 재미난 일들을 말씀드리고는 있지만..
가끔 부모님의 잔소리가 한소리씩 얹어진다.

아빠는 말했다. ‘너 이제와서 회계 자격증 따봤자 소용이 없어. 네 나이 또래는 이미 과장급인데 니가 어쩌려고 그래.’
엄마는 말했다. ‘너 도대체 이러다 일평생 공부만 하다 끝날거 같다. 언제 젊음을 즐기려고 그래.’

아.. 또 마음이 아프네.. ㅎ
20살때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학창시절에 내성적이어서 받았던 상처는 생각도 안하시고.. 학교 공부만해서 소용이 없다.. 좀 동기들이랑 어울려라..
공무원 준비를 해라.. 휴학은 절대 안된다.. 취직이 안되면 대학원에 적을 두고 공무원 준비를 해라..
6년다닌 회사를 뒤로할때도.. 이제와서 나가서 뭐해먹고 살려고 그러냐..
무역 자격증 공부를 할때도.. 이제와서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냐..
공부만 해서는 부자 못된다. 부자 되는 공부를 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빠 말이 맞았을 수도 있다.
딴 자격증들 다 소용 없었으니까.
근데 후회는 덜할 수 있었다.
내가 선택했고, 도전했고, 공부로 성취해봤는데 결국 직업으로 갖는건 실패했으니까..
가봤으니까.. 그걸로 됐다.
그래서 이번 말도.. 뭐.. 나 걱정해서 그런 말씀 하시는건 알겠는데.. 그냥 흘러 넘기기로 했다.
상처 받는건 의미가 없다. 상대방이 상처받으라는 의도로 한 말도 아닌데.. 나 혼자 상처받으면 나만 손해다.

나한테는 어차피 이젠 뭐가 별로 없다.
오랜시간 투자했던 공부도.. 결국 성공적으로 끝난건 아니라서 이젠 예전에 친했던 다른 사람들을 다시 만나기도 쪽팔리고..
페이가 많아서 내가 원하는걸 척척 사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도 아니고..
지금 하는 일은 내 꿈과는 거리가 멀어서.. 그냥 감사하게만 다닐 뿐.. 이제는 일을 내 몸 갈아가며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기엔 너무 이때까지 실망을 많이 했고 지쳤다.
남친이 있어서 내가 어느날 갑자기 새 가정을 꾸려서 애를 놓을 것도 아니고..
그냥.. 인생은 혼자인거지..

그래서 나는 아직 꿈을 계속 꾸기로 했다.
어쩔 수 없이 올 9월까지는 회계 공부를 해야겠지만…. (아직 53강 중에 18강까지 밖에 못봤다 ㅠ)
다시 NCS 준비하고.. 1년치 연구소 보고서들 조사해야지..
그래서 내년에는 또 다른 도시에서 일하고야 말 것이다.

실패할 확률은 높다. 또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해야 한다.
근데 내년까진 그래보려고…
아직 토익점수가 살아있다.

20대 때 내 꿈을 위해서 끝까지 달리지 않은 대가가 이거니까..
나는 성공이든 실패든 끝까지 해보고 결판을 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번에 이걸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유야무야 시간을 허투루 쓴다면..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후회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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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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