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오랜만에 쓰는 블로그 글이다.
전에는 한 달에 한 번씩 글을 쓰자고 다짐했건만, 나아지지 않는 현실 속에서 그 결심조차 부끄러워졌다.
내 인생이 만약 해리포터 같은 베스트셀러 소설이고, 내가 주인공이었다면, 나는 벌써 내가 하고 싶었던 모든 것을 이뤄내고, 해피엔딩을 맞이했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소설 속의 주인공이 아니었고, 결국 다시금 마음먹었던 꿈의 기업은 입사하지 못한 채, 올 12월을 맞이하고야 말았다.

그 사이의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어떤 말부터 적어야 할지.. 몇 달 째 내 머릿 속에 헝클어져 있던 생각을.. 이 글 하나로 다 정리가 될 지.. 오늘은 그것조차 자신이 없다.



1.

올해 5월, 그러니까 이 글의 직전 글에 면접 준비하던 때의 글은, 올 상반기 코트라의 지방 지부의 전문직 관련 채용 면접을 준비하던 때의 일이었다.
무역관련 3개의 자격증, 그러니까.. 무역영어, 국제무역사, 원산지관리사가 통했던 덕분일까..
어떻게 기회가 오게 되어서, 하루동안 필기시험, 영어면접, 1차 면접을 보게 되었다.
필기 시험에서 1차면접까지 단 40분의 시간동안 점심식사를 해결하는게 쉽지 않았다.
1시가 지나고 1차 면접을 보게 됐지만.. 전시회를 기획해보지 못한 나는.. 또다시 논문으로 상을 받아보지 못한 나는.. 결국 그 회사에 맞는 인재가 아니었음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작년 하반기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일련의 시간들을 겪으며 느꼈던건..
나는 결국, 통상직도, 전문직도.. 최종합격까지 가기에는 부족했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기존의 내 전공이 아닌 다른 분야의 논문으로 상을 받거나.. 교내 영자신문 기자가 되거나.. 해외영업을 하는 등의 경력을 가지는건.. ‘나’의 경험에 부합하지 않았어서..
만약 리셋버튼이 있어서 20살부터 다시 살아갈 수 있다면.. 혹여나 가능하겠지만.. 이미 서른 다섯번 째 해를 살아낸 나에게는.. 이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31살에 뒤늦게 무역사무를 가려고 준비된 어학과 자격증을 갖추었어도.. 결혼하고 애낳아야 할 나이때문에, 경력이 맞지 않아서, 지방대 출신이라.. 등과 같은 이유로 무수히 많은 중소중견기업의 서류, 면접을 넘기지 못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해외를 한 번도 나가보지 않아도.. 업무적으로는 외국인이랑 의사소통이 될 정도의 외국어 실력을 갖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 ‘해외를 나가서 오랫동안 외국인과 부딫혀본 경험’이 없다는게.. 결국은 내 발목을 붙잡아왔고.. 만약 계속 이 분야를 도전한다면.. 앞으로도 붙잡힐 것임을 알게 되었다..

24살, 학부를 졸업할 때는 그냥 토익 960점에 JLPT N1 쪼가리 따위나 있는 머저리 취급을 받았었고..

25살부터 실제로 업무를 시작하면서..
제 아무리 한국에 있는 외국인에게 영어로 한국어 과외를 했다 한들..
일본어로 일본인 딜러한테 통역을 해줬다고 한들..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 뿐만 아니라 모국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자기네 나라 말의 억양이 섞여가며 영어하는 것도 어느정도 알아듣고 소통했다고 한들..
어차피 해외영업에 근무할 게 아니라면.. 이직할 때는 참.. 사기업이든 공기업이든.. 그렇게도 인정받지 못하던 시간들이었다..
근데 웃긴건.. 그렇다고 내 성격을 외향적으로 바꿀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 외국물을 한번도 먹어보지 못해도 어느정도는 2개의 외국어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이상은 자랑스럽지 않아졌고.. 그냥 이게 나의 특성이구나.. 싶은 부분이 되었다.
그렇게 돈벌이를 하려고.. 그리고 돈벌이를 하면서 앞으로도 더 실력을 키워나가겠다며 내 나름대로 노력해왔던 시간들이..
결국 꽃을 피우지도 못한 채로 그대로 먼지에 쌓인 지.. 올해로 벌써 4년째였으니까..

올 상반기 5월 말에, 결국 전문직 1차 탈락이란 결과를 받고..
밤에 아무도 없는 빈 사무실에서 혼자 그만 짐승처럼 꺽꺽 울어버렸다.
이제는 정말 20살부터 시작해왔던 내 오랜 꿈이 완전히 끝났음을 알게됐기 때문이었다.
이 때까지 내 나름대로 열심히 살지 아니한 것은 아니었으나, 최종관문, 그 한 발자국을 넘기에는 내가 살아왔던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에..

나는 여태껏 까만 밤하늘의 북극성을 보며 목적지를 찾아간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결국 태양을 향해 날아가다가 날개의 밀랍이 녹아서 하늘 위에서 추락해버린 이카루스가 된 마냥..
몸과 마음이 산산조각나는 것만 같았다.

산산조각난 마음을 끌어안고 나는 생각했다.
‘이 때까지 경제 논술 위주로 준비했었는데.. 망했네.. ㅎㅎ 나 경제도 사실 그렇게 잘하지는 못하는데..
내 장점이라며 20대 내내, 30초반까지 준비해왔던 영어도, 일본어도 못살리고..
이제 어쩌지?’



2.

2023년 6월부터, 나는 회사에서 저녁을 먹고, 회사 근처의 카페로 가서 다시금 공부를 시작했다.
이번 공부 과목은.. 경영과 경제..
경영은 전공이었지만.. 학부를 졸업한 지 10년이 넘었다..
그래도 나는 내 전공 좋아했으니까..
경제는 정말 괴로워하며 ‘나는 빡대가리인가’라며 공부해왔지만..
그래도 공부하면서 어느 순간 경제신문의 기사들이 이해되기 시작했고..
그래도 어느 순간 통합전공, 혹은 상경통합의 경제학 문제들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으니까..
계산문제는 조금 힘들어도.. 말 문제의 보기들이 이해가 됐고, 답을 조금씩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덧붙여.. 이제는 회계도 조금씩 공부하기 시작했다..
원래 재무회계, 원가회계까지 공부했던 경험이 있고.. 각종 계정과목과 부가가치세까지 대략적으로 공부한 경험이 있으니까..
학부 때는 그렇게 치를 떨던 재무 파트도.. 아직도 많이 어려웠지만..
미시,거시 경제를 배우고 난 뒤에 다시 훑어보니.. 의외로 익숙한 그래프들이 나와서.. ‘어? 너? 니가 왜 거기서 나와?’ 라며 새삼 놀랐다..

그리고 나는 이제 다른 공공기관의 공고에도 서류를 내기 시작했고, 필기시험을 보러 갔다.

사실 쉽지 않았다.
회사를 다니면서 매달 몇 개씩 자소서를 써서 내야하는 것도,
거의 2주마다 한 번씩 서울이며 지방이며 돌아다니며 필기시험을 보는 것도..
또 무슨 행사마냥 필기가 끝난 후엔 당연히도 ‘불합격’ 통보를 받는 것도..
다 너무 지치고 마음이 상하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퇴근 후에 카페에서 1~2시간씩 매일 공부하는 것을 다시 습관으로 잡는 것도 쉽지 않았다.
시험이 없는 주말 내내 공부를 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그치만 6월, 7월, 8월, 9월.. 넘어가며..
주중에 카페에서 음료 하나 시켜놓고 공부하는 것은.. 어느덧 내겐 힐링의 시간이 되었다.
저녁을 먹고, ‘카페 마감 시간의 20분 전까지 최대한 집중해서 공부한다’가 내 목표였다.
저녁 공부를 끝내고 달력에 ‘참 잘했어요’ 스티커를 붙이면, 그 날은 뿌듯함을 안고 잠이 들었다.

이제는 너무 초조하지 않기로 했다.
전전긍긍해가면서 내 인생 바꿀거라며 공부했던 무역자격증 3개로도.. 결국은 내 인생을 바꿀 수 없었고..
코트라, aT 가겠다며 전전긍긍하면서 경제학 공부하고 NCS 공부하고 한국사 자격증 땄어도.. 그것들이 결국 내 인생을 바꾸진 못했으니까..
오히려 불안하기만 하며.. 걱정하느라 현재에 몰입하지 못하고 헛되이 보낸 시간들이 나 스스로를 절망에 빠뜨리고 숨통을 조여왔다고 생각했다.

나는 하루에 많은 시간을 집중하지는 못해도, 단기간에 뭔가를 해치우는건 잘 못해도, 무언가를 꾸준히 하는건 자신이 있었다.
한 분야에 일을 꾸준히 해왔던 경험도 있고, 일을 하면서도, 심지어 야근을 해도.. 시간을 쪼개어 꾸준히 어학공부를 해왔던 경험이 있었으니까.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도, 저녁에 외국어를 공부할 때엔.. 마치 내가 해외에 나와있는 사람인양, 행복해하며 몰입했던 경험이 있었으니까.

일을 하며 공부하는 경험은.. 내가 사회생활을 해왔던 지난 8년동안 꾸준히 해왔던 일이었기 때문에..
만약 합격 불합격을 떠나서 공부를 한다는 것에 취미를 붙인다면.. 그거는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을 바꿨다.
어차피 이렇게 또 경로를 틀은 이상.. 한동안 합격은 어려울텐데.. 새로운걸 배워가는 재미로, 또 내가 예전 대비 현재는 점수가 얼마나 오르는지.. 필기시험 결과를 목표로 시험준비를 하자고..



3.

어느 날은 서울에서 시험을 보는데.. 전공시험 때부터 한강에서 BTS페스타 때문에 시험장까지 한 시간 내내 소음이 들렸던 적도 있었다.
시험이 끝나고.. 한강을 걷는데.. 이미 보라보라한 사람들 속에서.. ‘한강은 별세계 같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친구와의 약속이 잡혀서.. 3시간동안 뭘할지 고민하다가.. 페스타와는 한참 떨어진 곳에서 강변 테이블에 앉아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날은 화창했고, 한강에는 요트가 떠다녔고, 바람이 불었지만, 여름이라서 더웠다.

공부를 하는데, 어디선가 연세가 지긋하신 남녀 약 10여명이 내 자리 근처로 다가왔다.
나주에서 오랜만에 어린시절 동창생들이 서울로 놀러왔다고 하셨다.
“공부하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 지금 자리가 없어서 그러는데 같이 앉아도 되겠냐”고 물으시기에, 별 생각없이 괜찮다고 했다.

근처에 아이스께끼를 팔던 상인이 있었는데, 그 분들께서 아이스크림을 사 드셨다.
나도 먹으려고 지갑 속의 현금을 손으로 꼼지락 거리고 있는데.. 그 분들이 내 아이스크림까지 같이 사주셨다.
감사해하며 더운 여름에 차가운 아이스께끼를 먹고 있는데..
한 분께서 내 책을 보더니.. 공기업을 준비하냐 물어보셨다.
필기도 잘 못붙는 터라..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져서 어물쩡거리며 맞다고 했더니..
한 분께서 본인도 최근에 은퇴하셨다며.. 이렇게 주말에 야외에서도 공부하는게 기특하다며.. 꼭 우리 공기업에 들어오라 하셨다.
그리고 본인의 기업명을 적어주셨다..

그 기업명을 보고..
‘네? 저 얼마 전에 신의 직장에 떨어졌는데.. 또 다른 신의 직장에 지원하라고여? 제가여? 할 수 있을까여?’라고 생각했지만 차마 그 분께 말은 하지 못했다.. ㅎㅎㅠㅠ
그치만 그 다정함에 감사해지는 토요일 오후 4시였다.



4.

2주 전에 aT 필기시험을 보고 왔다.
이 때까지 본 필기시험 감독관님들 중에 역대급으로 잘생기신 분이 계셔서 개놀랬다.
지난 10년동안 봤던 공공기관 필기 감독관 중에 역대급 미남이라.. 세상에.. 살다보니 이런 일도 다 있구나.. 너무 신기했다.
이 때까지 한번도 누군가한테 번호를 딴 적이 없었는데.. 마지막에 시험 끝나고 집가면서도..
‘더 늦기 전에 번호를 달라고 해볼까?’라고 수많은 내적 갈등을 했지만 결국 따지 못했다.. ㅋㅋㅋㅋㅋ ㅠㅠㅠㅠㅠ

그치만 내 딴에 시험은 진짜 열심히 봤다.
결과가 나왔는데.. 내가 이제까지 본 aT 시험 중, 논술시험을 제일 잘봤다.

오랜만에 본 aT 필기 시험 문제는.. 예전과는 문제의 기조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번에는 농업 관련 문제가 거의 안나오고.. 경제 관련 문제만 2개의 문항..
그 중 하나는 농업 관련 썰을 같이 풀어야 하긴 하지만..
예전처럼 KREI 보고서를 1년 치를 본다고 과연 이 문제를 풀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드는 문제였다..

그치만 또 불합격.. 예..
근데 또 산술평균 내보니까 내가 합격선보다 높게 나온거 같은데 불합격이래서..
왜 또 불합격이지? 라고 생각하고 가중평균으로 계산해보니..
예.. 또 합격선이랑 2점 차이 나고여..
또 NCS에서 발렸고여..

하.. 진짜.. 내가 시중에 나온 NCS 봉투모의고사도 거의 다 풀었는데..
이제 PSAT형이든 모듈형이든 문제 유형은 어느정도 다 파악해서 문제도 80% 이상 다 맞는데..
시간 단축이 죽어라고 안된다..

그리고 아마.. 큰 이변이 없다면 이번이 내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보는 aT 시험이 될 터였다.



5.

그치만 결국 한 달 전, 이번에 한 지방의 공공기관에 이직하게 되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상사께 보고하는 능력, 산업에 대한 이해, 논술관련 스킬 등이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면접에서 대놓고 ‘우리랑은 하나도 호환이 안되는 경험이네요’라며 면접 내내 쪼인트를 까인게 수차례..
그치만 나는 어떤 상황이든 여유가 있어야 했다.
내가 면접 자리에서 여유가 없는 모습을 보인다면, 이건 단순히 ‘나’ 스스로에 대한 것 뿐만 아니라, 지금의 나와 같이 일하고 있는 직장과, 팀에 대한 예의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결국 한 번의 필기와 두 번의 면접을 모두 통과하게 되었다.

부랴부랴 인수인계서를 작성하고 내 업무를 다 쪼개면서..
많은 동료들의 아쉬움이 섞인 축하를 받았다.
일주일 새에 약 백 여명 가까이 되는 동료들의 아쉬움과 축하를 받고 있자니..
새삼 내가 2년 넘게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과 업무 협업을 해왔구나 싶어서 놀랐기도 했고,
축하해주심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깊은 감사함을 느꼈다.

마치 머리 위로 별빛이 쏟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25살에는 전체 인원이 50명인 중소기업에서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했는데..
35살에는 사내에서 협업했던 동료들만 백 여명이었다니.. ㅎㅎ


그치만 이제는.. 진짜 외국어 쓸 일이 하나도 없다.
업무 자체도.. 내가 해오지 않은.. 또 다른 전문적인 일을 또 시작해야 하는 일이다..

이 때까지는 일을 하고 있어도.. 한편으론 꿈을 꾸고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던 날들이었다.
당연히 괴롭고 불안한 마음이 더욱 컸지만, 한 편으로는 ‘언젠가 내가 원하던 일을 할 수 있겠지’라며 미래가 조금은 기대되는 시간을 보내왔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준비되지 않았고, 원하지 않았었던 일을 새롭게 해야 한다..

이제는 ‘이제 막 사회초년생이 된 25살’이 아닌지라, 일을 시작하면 마냥 좋은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거라는걸 안다.
또 다시 스트레스를 받을거고.. 야근도 할거고.. 어느 날은 화장실에서 울기도 하겠지..
또 어느 날은 준비되지 않은 새 일을 하기 위해서 또 저녁에 공부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당장 수습을 어떻게 잘 끝내냐가 최대 관건이기도 하고..


그래서 사실은.. 좋기보다는 두렵다.
사회생활을 이미 알고 있어서, 두려움이 더욱 큰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제.. 중고 신입도 아니고.. 골동품 신입이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ㅠㅠㅠㅠㅠㅠㅠㅠㅠ




6.

4년 10개월이었다.

첫 6년 다닌 회사를 관두고.. 꿈을 향해서 마지막으로 도전하자며 준비해왔던 기간이었다.
그 중 2년 3개월은 대부분 공부에만 매달렸지만 잘 되지 않았고..
2년 7개월은 사회생활을 병행하면서 준비해왔다..

참.. 지금 생각해보면 쉽지 않은 날의 연속이었다.
그렇지만 잘 풀리지 않은 시간 속에서도.. 나를 향해 변치 않는 가족의 사랑을 느낄 수가 있었고..
직장에서 나를 지지해주는 동료애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비록 똑똑한 편은 아니었으나, 이제까지 인복은 많았던 것 같다.

사실 내가 성공하지 못한 것을 블로그에 나열하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어느덧 열심히 하는 것보다는 결과가 중요한 이 세상에서.. 나는 결국 원하던 최종 결과에 도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그치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러한 글들을 써 왔던 이유는 딱 두 가지다.
먼저.. 지금 이 순간에도.. ‘할 수 있을까?‘라며 불안해하기만 하는 또 다른 어린 김지인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준비했던거.. 좀 망해도 된다고..
꼭 모두가 똑똑하고 매일 순 공부시간 10시간 찍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잘 해내면 좋겠지만.. 설령 그렇게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비하하며 스스로 좀먹지 말아야 한다고…
인생은.. 빈 노트를 얼마나 좋은 것들로만 잘 채워나가느냐.. 라기보다는..
빈 노트를 도중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잘 완결해내는.. 한 권의 책을 쓰는 과정이라고..
그 과정이 비록 순탄하지만은 않을 수도 있고.. 힘들수도 있고.. 때로는 스스로를 탓하고.. 주변 환경을 탓할 수 있겠지만..
아무리 좋은 소설을 처음에 잘 쓰다가.. 아이디어가 도저히 생각이 안나서 도중에 미완성인 채로 끝내는 것보다는..
B급 소설이라도 본인의 올바른 신념대로 인생을 끝까지 완결해내는게 훨씬 중요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내가 15년 전으로 돌아가서 15년 전의 나한테 말해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건 사실 불가능한 일이니까.. ㅎㅎ

그리고 사실 성공 후기는 제가 아니어도 이미 다른 훌륭하신 분들이 많이들 썼습니당.. ㅎㅎ
에듀콘 때도 그랬지만.. 저는 남들과는 조금 다른 시각의 후기를 쓰는 편이라서..

그리고 두번째 이유는.. 먼 훗날, 혹시 누군가가 이 글을 보게 된다면.. 2020년대를 살아간 30대의 생애 중 하나를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이기도 하다..
뭐 이런게 유효한 데이터이겠냐마는.. ㅋㅋ
그 때까지 데이터가 남아 있겠냐마는.. ㅋㅋ
그리고 이렇게 마이너한 블로거의 글을 누가 보겠냐마는.. ㅋㅋ

이제.. 올 한 해동안 머릿 속에 잔뜩 쌓아놨던 기억들을 글로 정리했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동진 평론가의 유명 어록 중, 이런 말이 있다.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

참으로 다사다난한 4년 10개월이었다.
절대로 가까이 가지 못할거라 생각했던 꿈의 기업을 목전까지 가보기도 했고..
모든게 다 무너지는 절망적인 순간이 오기도 했지만..
’언젠가 한 번은 나한테 기회가 오겠지. 내가 비록 완벽하지는 않아도 한 번만 기회가 오면.. 그 때는 또 지금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 일어날거야.‘ 라는 마음으로 매일을 살아냈다.
나는 그래서.. 배트를 들고 경기장에 들어가는 야구선수처럼.. 내일도, 모레도, 매일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계속 나의 배트를 휘두르려 한다..
내 전체 인생으로 볼 때, 나의 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나는 언젠가 또 다시 나만의 홈런을 칠거니까.

Posted by 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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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간만에 면접 일정이 잡혔다.

최근들어 시험 준비만 하느라.. 외모를 가꿀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간만에 집에 가서 엄마한테 눈썹정리를 해달라고 했다.

엄마가 눈썹정리를 해주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30 중반에 면접 가는 딸을 위해 눈썹 정리를 해주는 엄마라니..
엄마한테 속상하진 않은지 물어봤다.
엄마는…..  너는 어렸을 때부터 남들보다 좀 느린 편이었다고.. 그러니까 괜찮다고 해주셨다.
엄마 말을 듣는데 눈에서 자꾸 눈물이 났다.
차오르는 눈물을 참으려고 했는데 소용이 없었다.

엄마는 말 없이 눈썹을 다듬다가 내 눈에 나오는 눈물을 휴지로 닦아주었다.



2.

면접을 가려면 오전 9시 반까지 서울 강남 한복판에 도착해야만 했다.
도저히 당일날 새벽에 화장하고 올라갈 자신이 없어서, 면접 전날에 짐을 싸고 한 비즈니스 호텔에 숙박을 했다.
면접장과는 불과 30분정도 되는 거리였다.

호텔에 부랴부랴 도착해서.. 근처 편의점에서 먹을걸 사고 호텔로 돌아오는데..
그래도 간만에 밖에 나왔다고 근처의 풍경을 보자니 속절없이 좋기만 했다.
그치만 호텔에서, 편의점에서 사온 음식을 우걱우걱 씹어먹으며, 아직 준비되지 않은 면접 자료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난번 면접장소에서 아이패드를 전혀 못썼던게 생각나서, 어떻게든 자료를 서면으로 갖고 있어야 계속 볼텐데.. 라는 마음밖에 없었던 것 같다.

자료가 어느정도 정리가 됐다고 생각한게 오후 10시..
호텔 프론트에 연락해서 프린트가 되는지 확인 후, 자료를 출력할 수 있었다.
밤 12시까지 가족들한테 약간의 인사와, 자료를 보느라 시간은 너무나 훅훅 지나갔다.
여전히 준비가 잘 되지 않은 것만 같아서 너무 마음이 이상했는데.. 내일 가야하니까 억지로 잠을 청했다.

침대는 푹신하고 방 안도 적당한 온도였지만,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하룻밤 새 잠에서 2~3번씩 깨다보니, 잠에서 다 깬게 오전 6시 무렵이었다.
비몽사몽하면서 씻고 부랴부랴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3.

그 날은 참으로 더운 날이었다.
5월 처음으로 해가 뜰 때의 온도가 30도가 되는 날이었다.
그 온도를 뚫고 정장 차림으로 가방과 캐리어를 끌고 면접장까지 갔다.

오전 9시 좀 넘어서 도착하고..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니..
사전에 공지된 대로 2번의 시험을 봤다.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NCS와 인성검사를 보고.. 너무 배고팠는데 12시 반부터 면접이 잡혀 있어서 밥조차 제대로 먹지 못했다.
간단히 바나나와 메추리알로 요기를 하고.. 허겁지겁 올라갔다.

첫 면접에서 1시간 반동안 또다시 자괴감이 들었던 것만 같다.
이 때까지 나름 열심히 해왔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대답을 할 때 면접관의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을 보면서..
아 망했다.. 라는 생각이 다시금 떠올랐고..
면접관이 나보다 더 나은 다른 면접자에게 더 관심을 보일 때,
아.. 진짜 망했다.. 라는 생각이 더 떠올라서 긴장감이 스멀스멀 차올랐다.

하지만 한편으론 나는 너스레를 떠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너무 초라해질 것만 같았다.
나는.. 여유가 있어보여야 하는 사람이어야 했다.
이 회사에 오는게 간절하지만, 만일 안되더라도 그냥 최소한의 자존감은 계속 갖고있어야, 이 면접 이후에도 나를 지킬 수 있을것만 같았다.
면접이 끝나도 내 삶은 계속 이어지니까.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너스레를 떨 수 있었던 원동력은.. 지금의 회사 사람들과 같이 근무해왔던 시간들이었다.



4.

그 이후에 이어진 영어 면접.
이번 면접에는 1대 1로 이뤄졌다.
면접 초반에 간단한 아이스브레이킹을 했는데, 내가 해외 경험이 없다고 대답하자, 놀란 얼굴로 진짜 해외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냐고 내게 되물어봤다.
지난 10년동안 여러 곳에서 영어도 배워보고.. 영어면접도 몇번 해봤지만.. 상대방의 그런 말에 내가 더 살짝 당황스럽고 웃음이 났다.

그래.. 예전에는 해외경험이 없어도 외국인이랑 의사소통이 된다는걸 자부심으로 느끼기도 했지..
이제는 이 나이 되도록 해외경험이 없다는게 좀 창피할 일일수도 있지..
라는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다.

그치만 참으로 실로 오랜만에 영어로 말을 하니.. 기분이 좋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는 결국 외국어를 좋아했지.. 라는 과거의 행복한 기분이 다시금 들었다.
7분이라는 시간이 마치 7초와 같았다.



5.

돌아오는 길에 서울에서 꽃을 사서 내려왔다.
마치 내 인생이 꽃다발의 꽃과 같았다고 생각했다.
24살 12월, 부산의 한국선급에서 낮 12시부터 밤 10시까지 3개의 면접을 보고..
부랴부랴 대전으로 가는 마지막 KTX의 창가에서, 창틀의 노란 조명에 비치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내가 언제 이렇게 눈가에 주름이 생겼나.. 작게 속상해할 때가 있었다.
그 때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어딘가에 면접을 보러 다니고 있고.. 당연히 내 외모는 그 때보다 더 수그러 들었으리라..
그래서.. 평소엔 스스로 나무같은 사람이 되자고 생각했지만..
그 날은 유독 내가 꽃다발로 만들어진.. 시간이 지나면 시들고야 말 존재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 꽃다발을 받아보니, 그 찰나의 아름다운 순간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찰나이기에 더 아름다운거라고.. 그냥 이 순간도 내 인생의 청춘의 한 순간인거라고..
그래서 기념하기 위해 꽃다발을 사서 내려왔다.

그 날의 bgm은 왕페이의 몽중인이었다.
5년 전, 한 밤중에 강남에 무역 교육을 들으러 갔을 때, 비오는 고속버스에서 들었던 곡이었는데..
그냥 지금 이 순간에 들으면 수미쌍관에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경삼림의 왕페이도, 결국엔 양조위를 두고 도중에 자기 꿈 찾아서 캘리포니아로 스튜어디스 하러 갔었으니까..
청춘의 꿈의 시작과 마무리에는 이 노래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6.

회사에 돌아오니, 상사 중에 한 명이 자꾸 나한테 면접을 보러 갔다오지 않았냐 물었다.
그 분도 여러차례 다른데에서 이직을 해오신 분이고, 평소에 나한테 응원을 해주셨기에 순순히 그랬다고 대답했다.
잘 봤냐 물어보기에, 잘 보진 못했지만 열심히는 했다고 대답했다.
나한테 또 다른데는 면접 본 데는 없냐고 물었다.
다른데는 아직 필기 통과도 어렵다고 이야기 했다.
내 앞에서 ”왜 안되지“라고 하는데 순간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자신없어 하는 모습때문에 잘 안되는게 아니냐며, 나한테 뭐라 말했다.

정작 나는.. 이번 면접에는 승패는 크게 상관이 없었는데..
그냥.. 끝을 낼 수 있어서 좋았다는 뿌듯함과, 이거면 됐다는 만족감이 컸었는데..

그걸 겪고 나서.. 아무리 응원을 받아도, 이제는 더이상 내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른사람한테 함부로 섣불리 이래라 저래라 하질 않는데,
왜 타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지 모르겠다.

내 삶을 대신 살아보지도 않았으면서.
내가 작년과 이번 면접까지 어떤 마음으로 임했고.. 지금은 또 어떤 마음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 사람을 비롯한, 내게 한마디씩 얹는 사람들은 알까?
그들이 말하는 작은 한마디가.. 나한테는 얼마나 비수가 되어서 마음에 꽂히는지..
본인들의 의도가 나쁜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도.. 내가 느끼기에 아프면 아픈거잖아.



요즘은 그냥.. 잘 모르겠다.
사실 이제는 뭘 새로 할 힘도 없다.
내 시간을 너무 허무하게만 쓴 것만 같아.

나는 앞으로 인위적으로 뭘 아등바등 하려고 하지는 말아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내 뜻대로 안되는 인생.. 그냥 힘이 빠지면 파도를 타고 돌아다니는 해파리처럼 살아야지..

나는 해파리다.

Posted by 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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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집에서 밥을 같이 먹자는 연락이 왔다.
나는 거절했다. 나는 역시 나쁜 딸년이다.

최근 일주일간 장염때문에 배가 아팠다.
뭘 제대로 먹을수조차 없어서 퇴근하면 바로 잠들기 바빴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 기분이다.
금요일 저녁 7시에 자고 토요일 낮 12시에 일어났다.
배는 뭘 먹으려 하면 꾸물꾸물하며 아파올듯 말듯 한다.

회사에선 혼자있고싶다. 요즘은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 숨이 막히는 기분이다.

올 2월 초, 윗분들이 뒤에서 굳이 내 자리에 사람이 필요하냐는 말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내가 더 많은 일을 해줬으면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내 직급은 정규직이 아닌데.. 그치만 나는 내 직급보다 더 많은걸 하려고 스스로를 희생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다른 상사한테 공공연하게 들을 정도로 열심히 해왔는데..
나는 도대체 뭐지?

너무 쪽팔려서 블로그에 쓰고 싶지 않았지만..
그 말을 듣고 여러차례 다른데로 가려고 시도했지만 빈번히 실패하는 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나는 그냥 내가 너무 쓰레기같고 무기력해졌다.

이정도면 진짜 내가 문제가 있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엊그제 회사에서 왜 일본을 안가는데 일어를 배웠냐는 질문을 들었다.
나는 취직을 위해서라 답했다.
취직을 위해서라면 더 잘해야 하는거 아니냐, 그걸로 돈을 벌기는 어렵지 않냐는 말을 들었다.
나는 일본어가 메인이 아니고 다른거에 대한 서브이기 때문이라 말했다.
그치만 생각해보면.. 나는 다른 것들도 메인급으로 잘하진 못하는것만 같아.
그래서 나는 햇빛조차 잘 안드는 북향 원룸에서 이렇게 눅눅한 냄새나 풍기면서 살아가고 있는거겠지.


내가 첫 회사를 관둔지 벌써 햇수로 5년째..
그 비슷한 시기에 이직한 사람들은 어느덧 회사에서 자리잡고 주요한 인재가 된지도 5년째..
나는 만년 사무실 입구에서 앉아서 아등바등 한지 1년 9개월째..

혼자 있고 싶다.
가족도, 친구도, 회사도 다 필요없다.
그냥 누굴 상대할 여력이 없다.
살아남으려고 최선을 다해서 진심을 보여줘도 매번 배신만 당하는 나는..
과연 의미가 있는 삶인가 싶다.
나는 이 세상에서 어느날 갑자기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고 싶어.

아니 공부는 예체능이랑 다르게 굳이 상위 1%가 아니어도 먹고 산다며..
이게 뭐야..
나는 이제 한달에 200만원도 채 못 버는데..
나는 쓰레기야 진짜.

이제는 내 추한 모습을 감출만한 한 줌의 힘도 없다.
처음부터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텐데
두번 다시 월요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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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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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달 20일동안 NCS 봉투모의고사를 몇권을 풀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만큼 간절했다. 작년 이후로 보는 첫 시험이라서.
그리고 회사 안에서 겪었던 일련의 사건들 이후로.. 나는 더욱 간절해졌다.
주중에 하루 3시간, 주말에 6시간~7시간을 내리 공부했다.
체력 안배를 잘못해서 시험 3일전에 결국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기도 하고..
시험을 봤는데 너무 처참했다.
내가 잘한다고 생각했던 영역에서 너무 처참하게 발려서 다른 영역은 보는것조차 못했다.

주말엔 집에서 고기를 사두었길래 고기와 맥주를 마셨다.
내 꼬라지가 너무 웃겼다.
나는 지난 4년동안 주말이면 항상 죄책감이 떠나질 않았다.
1년이 52주니까 최소 208번의 죄책감은 느꼈을터였다.
요즘은 평일 저녁에도 죄책감이 든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는 결국 실패자다.
절망이 입 안의 사탕처럼 계속해서 데굴데굴 굴러가는 느낌이다.

인생.. 몇년이 지나도 새카맣기만 한 내 인생..
무능하기만 한 나..

Posted by 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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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주인은 방문자가 어떤 내 글을 봤는지 알 수 있다.
그 글의 조회수가 올라가니까..
그 방문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제 조회된 글 중, 내가 10년도 더 전에 썼던 글의 조회수가 올라갔다는 걸 알게 됐다.
2010년의 나는 ‘내가 늦었구나’ 라고 생각했구나.. 싶었다.
근데 2023년을 사는 지금의 나도 ‘내가 늦었구나’ 라고 생각해 ㅋㅋ

2010년의 나도 힘들다고 생각했고,
2023년을 사는 지금의 나도 역시 힘들다고 생각해 ㅋㅋ

얼마 전에 본 2번의 토익 점수 결과가 나왔다.
첫 토익은 905점이었다.
두번째 토익은.. 첫 토익이 900점이 넘었다는걸 알고 있었고..
그 주에는 갑자기 소개팅이 잡혀서 부랴부랴 가느라 공부를 하나도 못했는데..
945점이 나왔다.

소개팅 때는 상대방 남자가 “900점은 넘길수 있나요?”라고 물었을 때,
아직 905점 조차 점수가 나오지 않은 상태라서..
“글쎄요.. 나왔으면 좋겠네요 ㅎㅎ”라고 말했었는데..

그랬더니 상대방이 “그럼 850점을 넘기는거는요?” 라고 물었을 때,
“글쎄요.. 넘으면 좋겠는데 나올지 모르겠네요 ㅎㅎ”라고 웃어넘겼는데..

945점이라니..
난 역시 잘났어 ㅋㅋ

농담이고.. 어쨌든.. 예전부터 두려워했었고 갖고있었던 나만의 그릇된 명제를 이번에 하나 깼다.

내가 공기업 준비할때.. 미처 어딘가에 최종합격하지 못하고 토익점수가 만료됐을 때..
다시 토익을 봤을 때 토익 점수가 나오지 못하면 어떡하나.. 했던 그 명제.

그런 일이 일어날거라 생각도 못했는데 이번에 깨졌어.
인생은 역시 생각지도 못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사실 최근의 내 현실은 더 녹록치 않아졌지만, 나는 지지 않을거야.
이 쯤되면 오기도 생기고 빡치니까.
나는 이제 해피엔딩을 맞아야만 하겠다.

Posted by 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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