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오랜만에 쓰는 블로그 글이다.
전에는 한 달에 한 번씩 글을 쓰자고 다짐했건만, 나아지지 않는 현실 속에서 그 결심조차 부끄러워졌다.
내 인생이 만약 해리포터 같은 베스트셀러 소설이고, 내가 주인공이었다면, 나는 벌써 내가 하고 싶었던 모든 것을 이뤄내고, 해피엔딩을 맞이했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소설 속의 주인공이 아니었고, 결국 다시금 마음먹었던 꿈의 기업은 입사하지 못한 채, 올 12월을 맞이하고야 말았다.

그 사이의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어떤 말부터 적어야 할지.. 몇 달 째 내 머릿 속에 헝클어져 있던 생각을.. 이 글 하나로 다 정리가 될 지.. 오늘은 그것조차 자신이 없다.



1.

올해 5월, 그러니까 이 글의 직전 글에 면접 준비하던 때의 글은, 올 상반기 코트라의 지방 지부의 전문직 관련 채용 면접을 준비하던 때의 일이었다.
무역관련 3개의 자격증, 그러니까.. 무역영어, 국제무역사, 원산지관리사가 통했던 덕분일까..
어떻게 기회가 오게 되어서, 하루동안 필기시험, 영어면접, 1차 면접을 보게 되었다.
필기 시험에서 1차면접까지 단 40분의 시간동안 점심식사를 해결하는게 쉽지 않았다.
1시가 지나고 1차 면접을 보게 됐지만.. 전시회를 기획해보지 못한 나는.. 또다시 논문으로 상을 받아보지 못한 나는.. 결국 그 회사에 맞는 인재가 아니었음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작년 하반기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일련의 시간들을 겪으며 느꼈던건..
나는 결국, 통상직도, 전문직도.. 최종합격까지 가기에는 부족했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기존의 내 전공이 아닌 다른 분야의 논문으로 상을 받거나.. 교내 영자신문 기자가 되거나.. 해외영업을 하는 등의 경력을 가지는건.. ‘나’의 경험에 부합하지 않았어서..
만약 리셋버튼이 있어서 20살부터 다시 살아갈 수 있다면.. 혹여나 가능하겠지만.. 이미 서른 다섯번 째 해를 살아낸 나에게는.. 이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31살에 뒤늦게 무역사무를 가려고 준비된 어학과 자격증을 갖추었어도.. 결혼하고 애낳아야 할 나이때문에, 경력이 맞지 않아서, 지방대 출신이라.. 등과 같은 이유로 무수히 많은 중소중견기업의 서류, 면접을 넘기지 못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해외를 한 번도 나가보지 않아도.. 업무적으로는 외국인이랑 의사소통이 될 정도의 외국어 실력을 갖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 ‘해외를 나가서 오랫동안 외국인과 부딫혀본 경험’이 없다는게.. 결국은 내 발목을 붙잡아왔고.. 만약 계속 이 분야를 도전한다면.. 앞으로도 붙잡힐 것임을 알게 되었다..

24살, 학부를 졸업할 때는 그냥 토익 960점에 JLPT N1 쪼가리 따위나 있는 머저리 취급을 받았었고..

25살부터 실제로 업무를 시작하면서..
제 아무리 한국에 있는 외국인에게 영어로 한국어 과외를 했다 한들..
일본어로 일본인 딜러한테 통역을 해줬다고 한들..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 뿐만 아니라 모국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자기네 나라 말의 억양이 섞여가며 영어하는 것도 어느정도 알아듣고 소통했다고 한들..
어차피 해외영업에 근무할 게 아니라면.. 이직할 때는 참.. 사기업이든 공기업이든.. 그렇게도 인정받지 못하던 시간들이었다..
근데 웃긴건.. 그렇다고 내 성격을 외향적으로 바꿀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 외국물을 한번도 먹어보지 못해도 어느정도는 2개의 외국어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이상은 자랑스럽지 않아졌고.. 그냥 이게 나의 특성이구나.. 싶은 부분이 되었다.
그렇게 돈벌이를 하려고.. 그리고 돈벌이를 하면서 앞으로도 더 실력을 키워나가겠다며 내 나름대로 노력해왔던 시간들이..
결국 꽃을 피우지도 못한 채로 그대로 먼지에 쌓인 지.. 올해로 벌써 4년째였으니까..

올 상반기 5월 말에, 결국 전문직 1차 탈락이란 결과를 받고..
밤에 아무도 없는 빈 사무실에서 혼자 그만 짐승처럼 꺽꺽 울어버렸다.
이제는 정말 20살부터 시작해왔던 내 오랜 꿈이 완전히 끝났음을 알게됐기 때문이었다.
이 때까지 내 나름대로 열심히 살지 아니한 것은 아니었으나, 최종관문, 그 한 발자국을 넘기에는 내가 살아왔던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에..

나는 여태껏 까만 밤하늘의 북극성을 보며 목적지를 찾아간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결국 태양을 향해 날아가다가 날개의 밀랍이 녹아서 하늘 위에서 추락해버린 이카루스가 된 마냥..
몸과 마음이 산산조각나는 것만 같았다.

산산조각난 마음을 끌어안고 나는 생각했다.
‘이 때까지 경제 논술 위주로 준비했었는데.. 망했네.. ㅎㅎ 나 경제도 사실 그렇게 잘하지는 못하는데..
내 장점이라며 20대 내내, 30초반까지 준비해왔던 영어도, 일본어도 못살리고..
이제 어쩌지?’



2.

2023년 6월부터, 나는 회사에서 저녁을 먹고, 회사 근처의 카페로 가서 다시금 공부를 시작했다.
이번 공부 과목은.. 경영과 경제..
경영은 전공이었지만.. 학부를 졸업한 지 10년이 넘었다..
그래도 나는 내 전공 좋아했으니까..
경제는 정말 괴로워하며 ‘나는 빡대가리인가’라며 공부해왔지만..
그래도 공부하면서 어느 순간 경제신문의 기사들이 이해되기 시작했고..
그래도 어느 순간 통합전공, 혹은 상경통합의 경제학 문제들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으니까..
계산문제는 조금 힘들어도.. 말 문제의 보기들이 이해가 됐고, 답을 조금씩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덧붙여.. 이제는 회계도 조금씩 공부하기 시작했다..
원래 재무회계, 원가회계까지 공부했던 경험이 있고.. 각종 계정과목과 부가가치세까지 대략적으로 공부한 경험이 있으니까..
학부 때는 그렇게 치를 떨던 재무 파트도.. 아직도 많이 어려웠지만..
미시,거시 경제를 배우고 난 뒤에 다시 훑어보니.. 의외로 익숙한 그래프들이 나와서.. ‘어? 너? 니가 왜 거기서 나와?’ 라며 새삼 놀랐다..

그리고 나는 이제 다른 공공기관의 공고에도 서류를 내기 시작했고, 필기시험을 보러 갔다.

사실 쉽지 않았다.
회사를 다니면서 매달 몇 개씩 자소서를 써서 내야하는 것도,
거의 2주마다 한 번씩 서울이며 지방이며 돌아다니며 필기시험을 보는 것도..
또 무슨 행사마냥 필기가 끝난 후엔 당연히도 ‘불합격’ 통보를 받는 것도..
다 너무 지치고 마음이 상하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퇴근 후에 카페에서 1~2시간씩 매일 공부하는 것을 다시 습관으로 잡는 것도 쉽지 않았다.
시험이 없는 주말 내내 공부를 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그치만 6월, 7월, 8월, 9월.. 넘어가며..
주중에 카페에서 음료 하나 시켜놓고 공부하는 것은.. 어느덧 내겐 힐링의 시간이 되었다.
저녁을 먹고, ‘카페 마감 시간의 20분 전까지 최대한 집중해서 공부한다’가 내 목표였다.
저녁 공부를 끝내고 달력에 ‘참 잘했어요’ 스티커를 붙이면, 그 날은 뿌듯함을 안고 잠이 들었다.

이제는 너무 초조하지 않기로 했다.
전전긍긍해가면서 내 인생 바꿀거라며 공부했던 무역자격증 3개로도.. 결국은 내 인생을 바꿀 수 없었고..
코트라, aT 가겠다며 전전긍긍하면서 경제학 공부하고 NCS 공부하고 한국사 자격증 땄어도.. 그것들이 결국 내 인생을 바꾸진 못했으니까..
오히려 불안하기만 하며.. 걱정하느라 현재에 몰입하지 못하고 헛되이 보낸 시간들이 나 스스로를 절망에 빠뜨리고 숨통을 조여왔다고 생각했다.

나는 하루에 많은 시간을 집중하지는 못해도, 단기간에 뭔가를 해치우는건 잘 못해도, 무언가를 꾸준히 하는건 자신이 있었다.
한 분야에 일을 꾸준히 해왔던 경험도 있고, 일을 하면서도, 심지어 야근을 해도.. 시간을 쪼개어 꾸준히 어학공부를 해왔던 경험이 있었으니까.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도, 저녁에 외국어를 공부할 때엔.. 마치 내가 해외에 나와있는 사람인양, 행복해하며 몰입했던 경험이 있었으니까.

일을 하며 공부하는 경험은.. 내가 사회생활을 해왔던 지난 8년동안 꾸준히 해왔던 일이었기 때문에..
만약 합격 불합격을 떠나서 공부를 한다는 것에 취미를 붙인다면.. 그거는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을 바꿨다.
어차피 이렇게 또 경로를 틀은 이상.. 한동안 합격은 어려울텐데.. 새로운걸 배워가는 재미로, 또 내가 예전 대비 현재는 점수가 얼마나 오르는지.. 필기시험 결과를 목표로 시험준비를 하자고..



3.

어느 날은 서울에서 시험을 보는데.. 전공시험 때부터 한강에서 BTS페스타 때문에 시험장까지 한 시간 내내 소음이 들렸던 적도 있었다.
시험이 끝나고.. 한강을 걷는데.. 이미 보라보라한 사람들 속에서.. ‘한강은 별세계 같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친구와의 약속이 잡혀서.. 3시간동안 뭘할지 고민하다가.. 페스타와는 한참 떨어진 곳에서 강변 테이블에 앉아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날은 화창했고, 한강에는 요트가 떠다녔고, 바람이 불었지만, 여름이라서 더웠다.

공부를 하는데, 어디선가 연세가 지긋하신 남녀 약 10여명이 내 자리 근처로 다가왔다.
나주에서 오랜만에 어린시절 동창생들이 서울로 놀러왔다고 하셨다.
“공부하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 지금 자리가 없어서 그러는데 같이 앉아도 되겠냐”고 물으시기에, 별 생각없이 괜찮다고 했다.

근처에 아이스께끼를 팔던 상인이 있었는데, 그 분들께서 아이스크림을 사 드셨다.
나도 먹으려고 지갑 속의 현금을 손으로 꼼지락 거리고 있는데.. 그 분들이 내 아이스크림까지 같이 사주셨다.
감사해하며 더운 여름에 차가운 아이스께끼를 먹고 있는데..
한 분께서 내 책을 보더니.. 공기업을 준비하냐 물어보셨다.
필기도 잘 못붙는 터라..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져서 어물쩡거리며 맞다고 했더니..
한 분께서 본인도 최근에 은퇴하셨다며.. 이렇게 주말에 야외에서도 공부하는게 기특하다며.. 꼭 우리 공기업에 들어오라 하셨다.
그리고 본인의 기업명을 적어주셨다..

그 기업명을 보고..
‘네? 저 얼마 전에 신의 직장에 떨어졌는데.. 또 다른 신의 직장에 지원하라고여? 제가여? 할 수 있을까여?’라고 생각했지만 차마 그 분께 말은 하지 못했다.. ㅎㅎㅠㅠ
그치만 그 다정함에 감사해지는 토요일 오후 4시였다.



4.

2주 전에 aT 필기시험을 보고 왔다.
이 때까지 본 필기시험 감독관님들 중에 역대급으로 잘생기신 분이 계셔서 개놀랬다.
지난 10년동안 봤던 공공기관 필기 감독관 중에 역대급 미남이라.. 세상에.. 살다보니 이런 일도 다 있구나.. 너무 신기했다.
이 때까지 한번도 누군가한테 번호를 딴 적이 없었는데.. 마지막에 시험 끝나고 집가면서도..
‘더 늦기 전에 번호를 달라고 해볼까?’라고 수많은 내적 갈등을 했지만 결국 따지 못했다.. ㅋㅋㅋㅋㅋ ㅠㅠㅠㅠㅠ

그치만 내 딴에 시험은 진짜 열심히 봤다.
결과가 나왔는데.. 내가 이제까지 본 aT 시험 중, 논술시험을 제일 잘봤다.

오랜만에 본 aT 필기 시험 문제는.. 예전과는 문제의 기조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번에는 농업 관련 문제가 거의 안나오고.. 경제 관련 문제만 2개의 문항..
그 중 하나는 농업 관련 썰을 같이 풀어야 하긴 하지만..
예전처럼 KREI 보고서를 1년 치를 본다고 과연 이 문제를 풀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드는 문제였다..

그치만 또 불합격.. 예..
근데 또 산술평균 내보니까 내가 합격선보다 높게 나온거 같은데 불합격이래서..
왜 또 불합격이지? 라고 생각하고 가중평균으로 계산해보니..
예.. 또 합격선이랑 2점 차이 나고여..
또 NCS에서 발렸고여..

하.. 진짜.. 내가 시중에 나온 NCS 봉투모의고사도 거의 다 풀었는데..
이제 PSAT형이든 모듈형이든 문제 유형은 어느정도 다 파악해서 문제도 80% 이상 다 맞는데..
시간 단축이 죽어라고 안된다..

그리고 아마.. 큰 이변이 없다면 이번이 내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보는 aT 시험이 될 터였다.



5.

그치만 결국 한 달 전, 이번에 한 지방의 공공기관에 이직하게 되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상사께 보고하는 능력, 산업에 대한 이해, 논술관련 스킬 등이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면접에서 대놓고 ‘우리랑은 하나도 호환이 안되는 경험이네요’라며 면접 내내 쪼인트를 까인게 수차례..
그치만 나는 어떤 상황이든 여유가 있어야 했다.
내가 면접 자리에서 여유가 없는 모습을 보인다면, 이건 단순히 ‘나’ 스스로에 대한 것 뿐만 아니라, 지금의 나와 같이 일하고 있는 직장과, 팀에 대한 예의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결국 한 번의 필기와 두 번의 면접을 모두 통과하게 되었다.

부랴부랴 인수인계서를 작성하고 내 업무를 다 쪼개면서..
많은 동료들의 아쉬움이 섞인 축하를 받았다.
일주일 새에 약 백 여명 가까이 되는 동료들의 아쉬움과 축하를 받고 있자니..
새삼 내가 2년 넘게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과 업무 협업을 해왔구나 싶어서 놀랐기도 했고,
축하해주심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깊은 감사함을 느꼈다.

마치 머리 위로 별빛이 쏟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25살에는 전체 인원이 50명인 중소기업에서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했는데..
35살에는 사내에서 협업했던 동료들만 백 여명이었다니.. ㅎㅎ


그치만 이제는.. 진짜 외국어 쓸 일이 하나도 없다.
업무 자체도.. 내가 해오지 않은.. 또 다른 전문적인 일을 또 시작해야 하는 일이다..

이 때까지는 일을 하고 있어도.. 한편으론 꿈을 꾸고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던 날들이었다.
당연히 괴롭고 불안한 마음이 더욱 컸지만, 한 편으로는 ‘언젠가 내가 원하던 일을 할 수 있겠지’라며 미래가 조금은 기대되는 시간을 보내왔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준비되지 않았고, 원하지 않았었던 일을 새롭게 해야 한다..

이제는 ‘이제 막 사회초년생이 된 25살’이 아닌지라, 일을 시작하면 마냥 좋은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거라는걸 안다.
또 다시 스트레스를 받을거고.. 야근도 할거고.. 어느 날은 화장실에서 울기도 하겠지..
또 어느 날은 준비되지 않은 새 일을 하기 위해서 또 저녁에 공부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당장 수습을 어떻게 잘 끝내냐가 최대 관건이기도 하고..


그래서 사실은.. 좋기보다는 두렵다.
사회생활을 이미 알고 있어서, 두려움이 더욱 큰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제.. 중고 신입도 아니고.. 골동품 신입이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ㅠㅠㅠㅠㅠㅠㅠㅠㅠ




6.

4년 10개월이었다.

첫 6년 다닌 회사를 관두고.. 꿈을 향해서 마지막으로 도전하자며 준비해왔던 기간이었다.
그 중 2년 3개월은 대부분 공부에만 매달렸지만 잘 되지 않았고..
2년 7개월은 사회생활을 병행하면서 준비해왔다..

참.. 지금 생각해보면 쉽지 않은 날의 연속이었다.
그렇지만 잘 풀리지 않은 시간 속에서도.. 나를 향해 변치 않는 가족의 사랑을 느낄 수가 있었고..
직장에서 나를 지지해주는 동료애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비록 똑똑한 편은 아니었으나, 이제까지 인복은 많았던 것 같다.

사실 내가 성공하지 못한 것을 블로그에 나열하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어느덧 열심히 하는 것보다는 결과가 중요한 이 세상에서.. 나는 결국 원하던 최종 결과에 도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그치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러한 글들을 써 왔던 이유는 딱 두 가지다.
먼저.. 지금 이 순간에도.. ‘할 수 있을까?‘라며 불안해하기만 하는 또 다른 어린 김지인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준비했던거.. 좀 망해도 된다고..
꼭 모두가 똑똑하고 매일 순 공부시간 10시간 찍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잘 해내면 좋겠지만.. 설령 그렇게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비하하며 스스로 좀먹지 말아야 한다고…
인생은.. 빈 노트를 얼마나 좋은 것들로만 잘 채워나가느냐.. 라기보다는..
빈 노트를 도중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잘 완결해내는.. 한 권의 책을 쓰는 과정이라고..
그 과정이 비록 순탄하지만은 않을 수도 있고.. 힘들수도 있고.. 때로는 스스로를 탓하고.. 주변 환경을 탓할 수 있겠지만..
아무리 좋은 소설을 처음에 잘 쓰다가.. 아이디어가 도저히 생각이 안나서 도중에 미완성인 채로 끝내는 것보다는..
B급 소설이라도 본인의 올바른 신념대로 인생을 끝까지 완결해내는게 훨씬 중요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내가 15년 전으로 돌아가서 15년 전의 나한테 말해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건 사실 불가능한 일이니까.. ㅎㅎ

그리고 사실 성공 후기는 제가 아니어도 이미 다른 훌륭하신 분들이 많이들 썼습니당.. ㅎㅎ
에듀콘 때도 그랬지만.. 저는 남들과는 조금 다른 시각의 후기를 쓰는 편이라서..

그리고 두번째 이유는.. 먼 훗날, 혹시 누군가가 이 글을 보게 된다면.. 2020년대를 살아간 30대의 생애 중 하나를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이기도 하다..
뭐 이런게 유효한 데이터이겠냐마는.. ㅋㅋ
그 때까지 데이터가 남아 있겠냐마는.. ㅋㅋ
그리고 이렇게 마이너한 블로거의 글을 누가 보겠냐마는.. ㅋㅋ

이제.. 올 한 해동안 머릿 속에 잔뜩 쌓아놨던 기억들을 글로 정리했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동진 평론가의 유명 어록 중, 이런 말이 있다.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

참으로 다사다난한 4년 10개월이었다.
절대로 가까이 가지 못할거라 생각했던 꿈의 기업을 목전까지 가보기도 했고..
모든게 다 무너지는 절망적인 순간이 오기도 했지만..
’언젠가 한 번은 나한테 기회가 오겠지. 내가 비록 완벽하지는 않아도 한 번만 기회가 오면.. 그 때는 또 지금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 일어날거야.‘ 라는 마음으로 매일을 살아냈다.
나는 그래서.. 배트를 들고 경기장에 들어가는 야구선수처럼.. 내일도, 모레도, 매일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계속 나의 배트를 휘두르려 한다..
내 전체 인생으로 볼 때, 나의 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나는 언젠가 또 다시 나만의 홈런을 칠거니까.

Posted by 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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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간만에 면접 일정이 잡혔다.

최근들어 시험 준비만 하느라.. 외모를 가꿀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간만에 집에 가서 엄마한테 눈썹정리를 해달라고 했다.

엄마가 눈썹정리를 해주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30 중반에 면접 가는 딸을 위해 눈썹 정리를 해주는 엄마라니..
엄마한테 속상하진 않은지 물어봤다.
엄마는…..  너는 어렸을 때부터 남들보다 좀 느린 편이었다고.. 그러니까 괜찮다고 해주셨다.
엄마 말을 듣는데 눈에서 자꾸 눈물이 났다.
차오르는 눈물을 참으려고 했는데 소용이 없었다.

엄마는 말 없이 눈썹을 다듬다가 내 눈에 나오는 눈물을 휴지로 닦아주었다.



2.

면접을 가려면 오전 9시 반까지 서울 강남 한복판에 도착해야만 했다.
도저히 당일날 새벽에 화장하고 올라갈 자신이 없어서, 면접 전날에 짐을 싸고 한 비즈니스 호텔에 숙박을 했다.
면접장과는 불과 30분정도 되는 거리였다.

호텔에 부랴부랴 도착해서.. 근처 편의점에서 먹을걸 사고 호텔로 돌아오는데..
그래도 간만에 밖에 나왔다고 근처의 풍경을 보자니 속절없이 좋기만 했다.
그치만 호텔에서, 편의점에서 사온 음식을 우걱우걱 씹어먹으며, 아직 준비되지 않은 면접 자료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난번 면접장소에서 아이패드를 전혀 못썼던게 생각나서, 어떻게든 자료를 서면으로 갖고 있어야 계속 볼텐데.. 라는 마음밖에 없었던 것 같다.

자료가 어느정도 정리가 됐다고 생각한게 오후 10시..
호텔 프론트에 연락해서 프린트가 되는지 확인 후, 자료를 출력할 수 있었다.
밤 12시까지 가족들한테 약간의 인사와, 자료를 보느라 시간은 너무나 훅훅 지나갔다.
여전히 준비가 잘 되지 않은 것만 같아서 너무 마음이 이상했는데.. 내일 가야하니까 억지로 잠을 청했다.

침대는 푹신하고 방 안도 적당한 온도였지만,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하룻밤 새 잠에서 2~3번씩 깨다보니, 잠에서 다 깬게 오전 6시 무렵이었다.
비몽사몽하면서 씻고 부랴부랴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3.

그 날은 참으로 더운 날이었다.
5월 처음으로 해가 뜰 때의 온도가 30도가 되는 날이었다.
그 온도를 뚫고 정장 차림으로 가방과 캐리어를 끌고 면접장까지 갔다.

오전 9시 좀 넘어서 도착하고..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니..
사전에 공지된 대로 2번의 시험을 봤다.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NCS와 인성검사를 보고.. 너무 배고팠는데 12시 반부터 면접이 잡혀 있어서 밥조차 제대로 먹지 못했다.
간단히 바나나와 메추리알로 요기를 하고.. 허겁지겁 올라갔다.

첫 면접에서 1시간 반동안 또다시 자괴감이 들었던 것만 같다.
이 때까지 나름 열심히 해왔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대답을 할 때 면접관의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을 보면서..
아 망했다.. 라는 생각이 다시금 떠올랐고..
면접관이 나보다 더 나은 다른 면접자에게 더 관심을 보일 때,
아.. 진짜 망했다.. 라는 생각이 더 떠올라서 긴장감이 스멀스멀 차올랐다.

하지만 한편으론 나는 너스레를 떠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너무 초라해질 것만 같았다.
나는.. 여유가 있어보여야 하는 사람이어야 했다.
이 회사에 오는게 간절하지만, 만일 안되더라도 그냥 최소한의 자존감은 계속 갖고있어야, 이 면접 이후에도 나를 지킬 수 있을것만 같았다.
면접이 끝나도 내 삶은 계속 이어지니까.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너스레를 떨 수 있었던 원동력은.. 지금의 회사 사람들과 같이 근무해왔던 시간들이었다.



4.

그 이후에 이어진 영어 면접.
이번 면접에는 1대 1로 이뤄졌다.
면접 초반에 간단한 아이스브레이킹을 했는데, 내가 해외 경험이 없다고 대답하자, 놀란 얼굴로 진짜 해외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냐고 내게 되물어봤다.
지난 10년동안 여러 곳에서 영어도 배워보고.. 영어면접도 몇번 해봤지만.. 상대방의 그런 말에 내가 더 살짝 당황스럽고 웃음이 났다.

그래.. 예전에는 해외경험이 없어도 외국인이랑 의사소통이 된다는걸 자부심으로 느끼기도 했지..
이제는 이 나이 되도록 해외경험이 없다는게 좀 창피할 일일수도 있지..
라는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다.

그치만 참으로 실로 오랜만에 영어로 말을 하니.. 기분이 좋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는 결국 외국어를 좋아했지.. 라는 과거의 행복한 기분이 다시금 들었다.
7분이라는 시간이 마치 7초와 같았다.



5.

돌아오는 길에 서울에서 꽃을 사서 내려왔다.
마치 내 인생이 꽃다발의 꽃과 같았다고 생각했다.
24살 12월, 부산의 한국선급에서 낮 12시부터 밤 10시까지 3개의 면접을 보고..
부랴부랴 대전으로 가는 마지막 KTX의 창가에서, 창틀의 노란 조명에 비치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내가 언제 이렇게 눈가에 주름이 생겼나.. 작게 속상해할 때가 있었다.
그 때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어딘가에 면접을 보러 다니고 있고.. 당연히 내 외모는 그 때보다 더 수그러 들었으리라..
그래서.. 평소엔 스스로 나무같은 사람이 되자고 생각했지만..
그 날은 유독 내가 꽃다발로 만들어진.. 시간이 지나면 시들고야 말 존재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 꽃다발을 받아보니, 그 찰나의 아름다운 순간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찰나이기에 더 아름다운거라고.. 그냥 이 순간도 내 인생의 청춘의 한 순간인거라고..
그래서 기념하기 위해 꽃다발을 사서 내려왔다.

그 날의 bgm은 왕페이의 몽중인이었다.
5년 전, 한 밤중에 강남에 무역 교육을 들으러 갔을 때, 비오는 고속버스에서 들었던 곡이었는데..
그냥 지금 이 순간에 들으면 수미쌍관에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경삼림의 왕페이도, 결국엔 양조위를 두고 도중에 자기 꿈 찾아서 캘리포니아로 스튜어디스 하러 갔었으니까..
청춘의 꿈의 시작과 마무리에는 이 노래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6.

회사에 돌아오니, 상사 중에 한 명이 자꾸 나한테 면접을 보러 갔다오지 않았냐 물었다.
그 분도 여러차례 다른데에서 이직을 해오신 분이고, 평소에 나한테 응원을 해주셨기에 순순히 그랬다고 대답했다.
잘 봤냐 물어보기에, 잘 보진 못했지만 열심히는 했다고 대답했다.
나한테 또 다른데는 면접 본 데는 없냐고 물었다.
다른데는 아직 필기 통과도 어렵다고 이야기 했다.
내 앞에서 ”왜 안되지“라고 하는데 순간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자신없어 하는 모습때문에 잘 안되는게 아니냐며, 나한테 뭐라 말했다.

정작 나는.. 이번 면접에는 승패는 크게 상관이 없었는데..
그냥.. 끝을 낼 수 있어서 좋았다는 뿌듯함과, 이거면 됐다는 만족감이 컸었는데..

그걸 겪고 나서.. 아무리 응원을 받아도, 이제는 더이상 내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른사람한테 함부로 섣불리 이래라 저래라 하질 않는데,
왜 타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지 모르겠다.

내 삶을 대신 살아보지도 않았으면서.
내가 작년과 이번 면접까지 어떤 마음으로 임했고.. 지금은 또 어떤 마음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 사람을 비롯한, 내게 한마디씩 얹는 사람들은 알까?
그들이 말하는 작은 한마디가.. 나한테는 얼마나 비수가 되어서 마음에 꽂히는지..
본인들의 의도가 나쁜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도.. 내가 느끼기에 아프면 아픈거잖아.



요즘은 그냥.. 잘 모르겠다.
사실 이제는 뭘 새로 할 힘도 없다.
내 시간을 너무 허무하게만 쓴 것만 같아.

나는 앞으로 인위적으로 뭘 아등바등 하려고 하지는 말아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내 뜻대로 안되는 인생.. 그냥 힘이 빠지면 파도를 타고 돌아다니는 해파리처럼 살아야지..

나는 해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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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달 20일동안 NCS 봉투모의고사를 몇권을 풀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만큼 간절했다. 작년 이후로 보는 첫 시험이라서.
그리고 회사 안에서 겪었던 일련의 사건들 이후로.. 나는 더욱 간절해졌다.
주중에 하루 3시간, 주말에 6시간~7시간을 내리 공부했다.
체력 안배를 잘못해서 시험 3일전에 결국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기도 하고..
시험을 봤는데 너무 처참했다.
내가 잘한다고 생각했던 영역에서 너무 처참하게 발려서 다른 영역은 보는것조차 못했다.

주말엔 집에서 고기를 사두었길래 고기와 맥주를 마셨다.
내 꼬라지가 너무 웃겼다.
나는 지난 4년동안 주말이면 항상 죄책감이 떠나질 않았다.
1년이 52주니까 최소 208번의 죄책감은 느꼈을터였다.
요즘은 평일 저녁에도 죄책감이 든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는 결국 실패자다.
절망이 입 안의 사탕처럼 계속해서 데굴데굴 굴러가는 느낌이다.

인생.. 몇년이 지나도 새카맣기만 한 내 인생..
무능하기만 한 나..

Posted by 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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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주인은 방문자가 어떤 내 글을 봤는지 알 수 있다.
그 글의 조회수가 올라가니까..
그 방문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제 조회된 글 중, 내가 10년도 더 전에 썼던 글의 조회수가 올라갔다는 걸 알게 됐다.
2010년의 나는 ‘내가 늦었구나’ 라고 생각했구나.. 싶었다.
근데 2023년을 사는 지금의 나도 ‘내가 늦었구나’ 라고 생각해 ㅋㅋ

2010년의 나도 힘들다고 생각했고,
2023년을 사는 지금의 나도 역시 힘들다고 생각해 ㅋㅋ

얼마 전에 본 2번의 토익 점수 결과가 나왔다.
첫 토익은 905점이었다.
두번째 토익은.. 첫 토익이 900점이 넘었다는걸 알고 있었고..
그 주에는 갑자기 소개팅이 잡혀서 부랴부랴 가느라 공부를 하나도 못했는데..
945점이 나왔다.

소개팅 때는 상대방 남자가 “900점은 넘길수 있나요?”라고 물었을 때,
아직 905점 조차 점수가 나오지 않은 상태라서..
“글쎄요.. 나왔으면 좋겠네요 ㅎㅎ”라고 말했었는데..

그랬더니 상대방이 “그럼 850점을 넘기는거는요?” 라고 물었을 때,
“글쎄요.. 넘으면 좋겠는데 나올지 모르겠네요 ㅎㅎ”라고 웃어넘겼는데..

945점이라니..
난 역시 잘났어 ㅋㅋ

농담이고.. 어쨌든.. 예전부터 두려워했었고 갖고있었던 나만의 그릇된 명제를 이번에 하나 깼다.

내가 공기업 준비할때.. 미처 어딘가에 최종합격하지 못하고 토익점수가 만료됐을 때..
다시 토익을 봤을 때 토익 점수가 나오지 못하면 어떡하나.. 했던 그 명제.

그런 일이 일어날거라 생각도 못했는데 이번에 깨졌어.
인생은 역시 생각지도 못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사실 최근의 내 현실은 더 녹록치 않아졌지만, 나는 지지 않을거야.
이 쯤되면 오기도 생기고 빡치니까.
나는 이제 해피엔딩을 맞아야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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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3년 1월 14일에는 토익 시험을 보러 만년중에 갔다.
작년 11월 중순부터 시작했던 산타토익 60일권의 만료를 하루이틀 앞두고 본 시험이었다.
전 날까지 팟7은 풀어보지도 못했고, 시험 전날에 또다시 연차를 내고 팟6만 5,6시간 내내 풀었다.
기존에는 LC와 팟5만 풀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렇게 6시간을 내리 푸니.. 어느덧 밤이 깊어서 팟7을 풀 수가 없었다.

산타토익은 언제 어디서나 앱으로 문제를 쉽게 풀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아이패드에 펜으로 필기가 안되는 특징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앱으로 팟7을 풀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토익시험장에서 부랴부랴 ETS 1000제 RC책을 갖고가서 팟7의 복문을 열심히 풀었다.
그냥.. 어렸을때 가장 두려워했던 상황이었던..
‘공기업을 준비하다가 토익이 만료가 됐을때 어떡하지’를 실로 맞이한 순간이었다.

시험 직전에.. 모든 책을 다 가방에 넣고 창 밖을 멍하니 쳐다보는데..
내가 이번 시험에서 과연 900점을 넘길 수 있을까.. 라는 걱정과,
내가 첫 토익을 봤던게 2010년이었는데.. 12년동안 뭐하는 짓이지.. ㅋㅋ 라는 작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물론.. 그 중에 6년동안은 토익을 놔버렸던거지만..
2018년, 20년, 22년.. 최근 4,5년은 그래도 토익을 계속 보고 있으니..
이제는 창 밖을 보며.. ‘아.. 시험보는 것도 이제 좀 지치려고 그래.’라는 생각을 약간 했다.

토익에서 LC는 도중에 말이 빨랐던 구간이 있어서 한 10문항 정도는 잘 캐치를 못했던 것 같다.
예전엔 LC가 495점 나왔을 때도 있었는데..
이제는 영어를 놓으니까 잘 안들리는 부분이 생기는구나.. 싶어서 좀 스스로가 답답해졌다.
내가 잘 못들어서 그렇지 그래도 스피커 음질은 괜찮았다.
문제를 풀다가 문득 교실의 스피커를 봤는데, 인터엠이라는 글자가 써있길래..
아.. 여기는 방송설비를 좋은 회사꺼를 쓰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속으로 혼자 웃었다.

RC는 의외로 5분의 시간이 남았는데..
팟7 공부를 제대로 안했던 터라.. 그냥 여기까지 한 걸로 만족하자란 생각이었다.

시험이 끝나고 터덜터덜 걸어 나오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다다음주에 토익을 보기위해서 또 접수를 했건만, 진이 다 빠져서 또 시험보기는 어렵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이러면 안되는데.. 900점 넘겨야 하는데..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역시 이제는 좀 지친 것 같아.



2.

그 다음날에는 오랜만에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다.
그 때 시간대가 맞는 영화가 ‘영웅’밖에는 없어서, 그 영화를 봤다.
영웅 안중근의 고뇌와 마지막을 담은 영화였다.

영화의 첫 부분에서 많이 놀랐다.
안중근 의사의 군대가 일본군을 이겼는데, 전쟁포로를 죽이지 않고 풀어주신 일이었다.
결국 그 전쟁포로는 살아서 돌아갔고, 안중근 의사의 군대는 큰 인명피해를 입었다.

어쩐지.. 처음부터 불안불안 하더라니..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 편으로는 저런 고귀한 성품을 가지신 분이니, 조국을 위해서 희생을 하실 수 있었던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세상에는 저렇게 좋은 성품을 가진 사람들을 찾기 힘든걸까..
모든 사람들이 좋은 성품을 갖고 있다면.. 쓸데없이 전쟁을 할 필요도, 다른 사람을 해칠 필요도 없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들었다.

영화의 엔딩 부근에는 조마리아 여사께서 안중근 의사께 보낸 편지의 내용이 나왔다.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었지만.. 새삼 놀라웠다.
좋은 성품의 부모님의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러한 성품을 가질 수 있었던 거겠지..

영화 엔딩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지금도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하는 문구가 나왔다.
일본 제국주의의 잔인함에 치가 떨렸다.
그치만 하늘에서 광복된 조선을 보시고 조금이라도 행복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덕분에 후손들이 잘 살고 있다고..
독립운동가 분들께 감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

목요일에는 소개팅을 했다.
회사에서 잡아주신 너무나도 갑작스런 소개팅이었다.
주선자께서 제발 렌즈를 끼고 나가라고 신신당부를 해서.. 평소에 잘 끼지도 않는 렌즈를 끼고 나갔다.

학부 때 받아봤던 소개팅 이후로, 두번째로 받아본 소개팅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때도 동갑, 이번에도 동갑이었다.
소개팅을 해본 적이 없어서 어쩌나.. 싶었는데.. 주선자께서 따로 전화를 주셔서..
상대방도 별로 경험이 없으니, 그냥 친구 만난다고 생각하고 편하게 만나라는 말씀을 하셨다.

한 카페에서 평소에 잘 마시지도 않는 요거트 스무디를 시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멀리서 상대방이 걸어왔다.
훈훈한 호남형 외모에 서글서글한 인상을 가지신 분이었다.

와.. 너무 긴장해서 스무디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고 있었는데..
어쩌다보니 포켓몬고 게임 얘기가 나왔다.
2년 전까지 취미생활로 틈틈이 했던 생각나면서 너무 반가웠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신나서 포켓몬고 이야기만 하고 왔다…… ㅠ
아마 소개팅에서 게임 얘기만 하는 여자는 나밖에 없을거야.. ㅋㅋ

그래서 결론은.. 잘 안됐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지만 간만에 옛날 취미가 다시 생각나서 좋았다.
오랜만에 포켓몬고 앱을 다시 깔고 다시 게임을 했다.

마지막으로 접속했던게 2021년 2월이었다.
아.. 그 때 21년도에 갑자기 공부를 그만두기 시작하면서 안하게 됐구나.. 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오랜만에 접속했던 게임은 2년동안 참 많은게 바뀌었고 어색했지만,
그래도 재밌었다. ㅎㅎ

나.. 왠지 취미를 다시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아.



4.

이렇게 정신없는 한 주를 보내고, 어제부터는 설날 연휴를 맞이해서 부모님 집에서 다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간만에 한전 모고용 NCS도 다시 풀고.. 이제는 경영학 문제집도 좀 풀어봤다.
경제.. 어려웠는데 상경통합 준비하려면 다시 해야겠지..
회계도.. 상경통합 준비하려면 해야겠지..
행정도.. 법도..


토익스피킹은 올해 2월이 지나면 만료가 된다.
19년 8월에 에듀콘 수강하고 나서 Lv.7 나왔었는데.. 그때는 170점이었고..
21년 2월에 다시 시험을 쳤을 때도 Lv.7 나왔었는데.. 그때는 나름대로 혼자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도 160점 컷트라인에 걸렸었다.

그치만 토스는 다시 하려니.. 이제는 포맷에 맞춰서 달달 외워서 하기가 너무 지치고..
오픽은 한번도 쳐본 적이 없고..
나는 영어회화를 안한 지 너무 오래됐고..

그래.. 아직 끝난건 아무 것도 없다.
내가 어디까지 힘을 낼 수 있을진 잘 모르겠지만..
성패는 둘째치고, 나는 내가 납득할 만한 결과를 얻기 위해 다시 최선을 다할거야.

뭐.. 어쩌면 이제 연애나 결혼을 못하게 될 수도 있지만..
모르겠다.. 또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를 돌아보면 하지 말라고, 그만하라고 나를 말리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다만, 인생은 원래 한 치 앞도 모르는거니.. 나는 지금 주어진거에 다시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역시 후회하고 싶지 않다.
내가 하는 선택들이 모여서,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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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계묘년 새해가 밝았다.
나한테 있어서는 35번째 새해이다.

내가 예전 회사를 그만둔지도 어느덧 햇수로 5년째가 되었고,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한 때부터 어느덧 10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5년동안 작은 성공과 큰 실패를 많이 겪어왔다고 생각한다.
회사 사정과 일이 적성에 안맞아서 6년동안 다닌 회사를 뒤로했던 일..
1년동안 무역자격증과 영어를 더 잘해보겠다고 고군분투하면서 자격증을 취득하고, 이력서를 넣고 면접봤던 일..
2020년, 새로 이직했던 회사에서 코로나 때문에 TO가 줄었다며 나가게 된 일,
그 뒤에 20살 때부터 그렇게 가고싶었던 공기업 가겠다고 경제, NCS, 한국사를 처음 배웠던 일,
결국 토익이 900점을 넘지 못해서 aT에 서류조차 합격도 못했던 일,
그래서 절치부심하는 마음으로 900점을 어떻게든 넘겼는데 엄마의 병환으로 공부를 그만두고 하루 빨리 취업으로 전환했어야 했던 일,
어떻게 운좋게 들어간 회사에서 최저시급으로 일을 시작하게 됐지만.. 내 권한에 비해 다양하고 많은 업무를 맡게 되어서 여러 날을 야근해가며 고군분투했던 일,
그 와중에 1년밖에 안남은 토익 만료 기간을 보고.. 이제 정말 내 인생으로 마지막에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그토록 꿈꾸고 간절히 근무하길 바랐던 KOTRA에 도전했던 일,
시험도 붙고 면접도 붙고 드디어 되나 싶었는데.. 결국 최종면접에서 미끄러져서 주말에 혼자 빈 방에서 나도 울고.. 결로때문에 집 천장도 울었던 일,
그리고 12월 20일부로 토익 만료… ㅎ

어찌보면 24살에 공기업을 생각하며 우려했던 가장 최악의 상황을, 35살의 내가 앞두고 있다.
그 때의 나는, 많은 자신이 없었다.
꿈의 기업은 애초부터 내 실력으로는 안될거라 생각했다.
다른 공기업 역시, 매번 벼락치기만 하는 나한테는 과분할거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에는 막 전공에서 NCS로 넘어가던 시기였는데, 나는 똑똑하지 않아서 NCS도 잘 못풀거라고 생각했다.
한국사 자격증은 또 언제 따냐며 한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공공부를 계속한다고 해도, 토익이 만료가 됐을 때 다시 또 토익점수를 만들 수 있을것인가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을 겪었고, 지난 5년동안은 내가 번 돈보다 쓴 돈이 더 많을 지경이었다.
그 5년동안 생계는 나아지지 않았고 나는 항상 외롭고 배고팠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들었던 국내여행, 뮤지컬,연극 등의 관람, 맛집탐방 등의 취미는 못한 지 꽤 오래였다.
남들이 월급을 모아서 해외여행을 가고, 명품을 살 때, 그건 내게 감히 언감생심, 꿈도 못꾸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20대 초에 학부에서 경영을 배우면서 그토록 가고 싶었던 인사분야로 결국 취직을 못했을 때도..
20대 내내 영어와 일본어를 어떻게든 배우겠다고 퇴근 후의 시간을 쪼갰고..
30대 초에 무역자격증을 취득하고 고군분투 했는데도 결국 무역 관련해서 커리어를 시작하지 못했을 때도..
나는 수많은 시간을 좌절했다.

30대 초에는 일종의 자신감도 있었던 것 같다.
20대 중반의 갓 졸업했던 나보다는 더 많이 준비했다는 자신감도 있었지만.. 현실에서 번번이 좌절하게 되면서.. 깊은 괴로움을 느꼈다.

공기업을 준비하는 30대 중반의 나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실패를 여러차례 겪게 되면, 어느 순간 스스로가 부족하고 못난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앞으로의 시간이 지나도, 이 갑갑한 현실이 절대 바뀌지 않을 것만 같은 못난 생각이 든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한편으로는.. 도전할만큼 도전해서 후회가 별로 없다.
만약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다면.. 오랜 꿈은 계속 내 마음 한 구석을 찔렀을 것이다.
중년이 되고, 노년이 되어도 마찬가지였겠지.

근데.. 이제는 후회가 그렇게 크지 않았다.
당장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의외로 속이 후련했다.



미래는 여전히 불안하고, 불확실하고, 두렵다.
2023년의 이번 정부의 기조는 공공기관의 인원 축소이다.
무기계약직의 자연감소분부터 더 TO를 채우지 않겠다고 했고, 신규 채용도 대폭 줄인다고 했다.
그럼 가장 먼저 모가지가 날아갈까 두려운 사람은 나다.
내가 바로 그 직급이니까.

나아지지 않는 통장잔고도 또다른 위협이다.
1년 반동안 나의 생계는 나아지지 않았고, 이 자리에 있으면 물가상승률 대비 나는 해마다 더 월급이 줄어들 것이다.

업무를 하는데 권한이 부족한 것도 위험요소이다.
권한 밖의 일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외부에서 봤을 땐 티가 하나도 안난다는 뜻이니까..
아무리 같은 부서원들이 일 잘한다고 나를 인정해주면 뭘해.. 부서 밖에서는 티가 안난다.
나는 그래봤자 무기계약직, 김그래다.


그래서 멈출 수가 없었다.
앞으로도 나아갈 수 있는 힘은 사실 지금은 없다.
근데 내 인생이 실패로 점철된다고 해도, 내가 생을 마감하는 그 순간에 내 과거를 돌아봤을 때,
‘실패할까봐 무서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보다는 ‘비록 실패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시도는 했다’라는걸 선택하고 싶다.


사실 이 나이쯤 되면, 주변에서 많이들 만류한다.
결혼하려면 연애해야지, 언제까지 니가 젊을 줄 아냐,
무기계약직이라도 만족하면서 그냥 저냥 욕심을 내려놓고 설렁설렁 일하고 작은 월급에 만족해라,
나이들어서 공부한다고 하면.. 아직까지 공부하냐..
일이랑 병행하려고 치면, 야근을 하거나, 일에 너무 기운을 뺏기면 공부할 여력도 없다.
체력은 또 개똥이지..

차라리 공부할 때 응원이라도 잔뜩 받았던 고3 시절이 이제는 좀 그리워질랑 말랑할 지경이지만..
차라리 24살, 25살, 26살에 조금 더 힘내서 공부로 조지고 빨리 공기업을 들어가는게 최선이지 않았나 싶지만..
지나간 과거는 어차피 돌아갈 수 없고, 나는 오늘을, 내일을 살아볼 예정이다.


나는 또 매일 실패와 성공을 할 작정이다.
다시금 오늘의 공부시간을 못채웠다고 우울해할테지,
또 어떤 날엔 역시 올해부터 공기업 TO가 줄었구나 체감하며 절망할거다.
그리고 또 어떤 날엔 필기나 서류에서 또 떨어져서 낙담을 할거다.

하지만 올해의 목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익을 900점을 다시금 넘고, NCS를 다시 하고..
전공을 본격적으로 시작해서 필기를 더 많이 붙겠다.
그리하여 면접도 가고.. 이직을 할 예정이다.

만약 올해 끝내 이직에 실패한다면..
결국 현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이 자리에 만족하기로 했다.

내가 스무살부터 지금까지 15년동안 배운거라곤,
최대한 후회를 적게하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 뿐이었으니까.
그냥.. 그 ‘경험’이 내가 젊을 때 샀던 대부분의 것이었다.
나는 돈이 없잖아.. 그럼 나에게 주어진 한도 내에서 경험이라도 사야지.


이 정도 나이가 되면, 도전을 해도 참 많은걸 걸어야 한다.
도전을 해도 성공하리란 보장이 없는건 20대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지만,
그 한 해, 한 해가, 20대의 1년보다 더 크게 느껴진다.

근데, 그래도 할래.
나는 역시, 한 곳에 계속 안주하고 싶지도 않고, 후회같은 건 되도록 하고싶지 않다.


설령 내 도전이 안좋게 끝난다고 해도,
어느 날 내 블로그에 우연히 본 누군가한테는,
2010~20년대를 살아간 한 젊은이의 고군분투기로 보여지겠지..
누군가의 반면교사가 된다면 그걸로 됐다.

나는 김지인이다.

Posted by 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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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말부터 12월에는 바빴다.

11월 말,
노조의 요청으로 교대 근무자의 근무가 일부 변경됐다.
그 건으로 우리 팀의 상사들과 일주일 넘게 고심하면서, 우리 부서에 맞도록 근무 스케쥴을 변형하는 아이디어를 짜느라 고생했다.
총무팀을 통해 노조에 전달하면서.. 이게 우리의 최선이었다고.. 잘 부탁드린다고 말을 전했다.



12월 초부터 중순까지는 갑자기 부서 송년회 준비를 해야 했다.
처음으로 준비해보는 송년회.
어떤 음식을 얼마나 준비할지, 어떤 선물을 하고 이벤트를 할지 모든 것이 막막했다.
심지어 영상도 만들었어야 했고..

그렇지만 많은 사람의 도움 덕분으로 해내게 됐다.
영상을 일주일동안 찍고, 막판에 12시 반까지 편집하느라 힘들었지만..
영상이 PC에 안옮겨져서 당일 이벤트 1시간 전에 부랴부랴 유튜브에 고화질로 업로드하는것도 힘들었지만..
이벤트 전날에 대설주의보라서 눈이 펑펑 오는데.. 그 눈을 뚫고 선물을 사느라 너무 힘들었지만..
이벤트 상품과 영상을 준비하느라 정작 발표준비를 하나도 하지 못해서.. ‘아.. 진짜 이번 발표 개망했다..’ 라며 절망적이었지만..
그래도 진심은 통했는지.. 당일에 다들 즐거워해주시는 모습들을 보니 너무 뿌듯했고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날에는.. 회사에 아세안 국가들의 각 정부 귀빈들이 오셔서 회사 투어를 했다.
팀장님의 요청으로 보조로 들어가게 되었다.
기존에 타기업에서는 딜러만 보다가.. 장,차관급이나 어느 회사의 대표분들을 포함해서 스무명씩 오시는데..
갑자기 의전에 투입되어서 보조하는 역할을 하는게 생소했다.
어차피 동시통역사가 있었던 상태였고..
나는 이제 영어를 안한지 너무 오래됐고.. 코트라 결과에서도 스피킹 점수가 그닥 좋지 않았던 편이었어서..
나 혼자 괜히 의기소침해하면서.. 2시간동안 그냥 영어로 간단한 안내만 해드리고 에스코트만 해드렸다.
그 에스코트를 하느라, 귀빈들보다 몇발짝씩 앞서서 뛰어다니는 바람에 땀이 좀 많이 나긴 했지만.. 뭐.. ㅎ

한 사람만 전담마크하면서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것과.. 수십명의 사람들이 가끔식 하는 이야기를 듣고 맥락을 파악하는건 좀 다른 문제구나.. 싶었다.
그치만 회계팀의 누군가는 진짜 잘하시던데.. 나 진짜 이제는 영어를 잘 못하는구나.. 싶어서 조금은 괴로운 하루였다.

그치만 투어가 다 끝날 무렵, 그 분들중에 한 분께서 나한테 감사하다고 해주셨는데..
그 별 것도 아닌 그 작은 한 마디가 위로가 됐다.



그 다음주의 12월 말의 언젠가에는 팀장님의 요청으로 경영에 대한 강의를 준비해야 했다.
학부를 졸업한게 10년이 넘었고.. 졸업 후에는 CS로만 근무했었고.. 지금은 제가 인사팀도 아닌데 이걸 하는게 자신이 없다.. 라고 말씀드렸지만..
본인들께선 해당 전공이 아니니, 전공이었던 자네가 해보는게 좋겠다고 하셨다.

부랴부랴 발표 전 날에 인터넷에서 경영전략에 관한 자료들을 찾아가며 자료를 준비했다.
차별화 전략과 원가 우위 전략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 회사의 3년치 재무상태표를 보면서 분석도 해봤다.
역시.. 졸업한지 오래됐는데 이게 될까 싶어서 ‘아.. 내일 또 개쪽 당하겠다..’ 싶었는데
그래도 당일에 다들 수고했다며 칭찬해주셨다.


2022년의 마지막 근무일에는, 갑자기 민원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월 마감을 해야 해서.. 근무자들 근무마감, 각종 부서 비용 마감들을 해야 하는데..
민원까지 받기에 너무 벅찼다. 그치만 해야지..
누군가는 그 빗발치는 민원을 받고 필드로 나가서 작업해야 하니까.. 작업을 원활하게 하려면 어쩔 수 없으니..
전화를 핸드폰으로 돌리고, 밖에서 업무처리하면서 민원을 받고 전달하느라 조금 많이 고생했고, 힘들었다.


그렇게 2022년이 끝나간다.
보통 때 같았으면, 한 해가 끝나가는게 섭섭하고.. 나이를 먹는 것 때문에 새해가 오는게 싫었을텐데..
이번엔 그냥 속이 후련했다.

그 말을 했더니.. 내 오랜 지인이,
혹시 ‘자포자기한 상태인게 아니냐’라는 말을 했다.

근데.. 자포자기라기보다는 그냥.. 속이 후련해..
나는 올해 초로 돌아가서 이 이상으로 잘 살 수 있겠냐고 물어보면.. 자신이 없다.
나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어쩔 수 없지.. ㅎ
내 역량은 여기까지였던거고.. 다 쏟아냈으니..


연말이라고, 한 여자 상사가 롤링페이퍼 작성을 제안해서 작성을 하게 됐다.
롤링페이퍼에 어떤 글귀가 있을까.. 마치 평가 받는 것만 같아서 쳐다볼 용기조차 못내고 있다가..
집에 가져가서 몇 시간만에 찬찬히 읽어봤다.

상사분들이 써주셨던 글들 중, 기억나는 글귀가 있었는데..
인생은 원래 불확실하고 불안정한거니.. 매순간 즐겁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말을 정규직 종사자에 들으니 조금은 아이러니했지만,
사실은 너무나도 당연했던.. 경영학에서는 ‘외부 환경은 불확실하다’ 라는 진리같은 그 말을.. 롤링페이퍼에서 다시 보게되니 기분이 이상했다.

30 중반에도 어디 하나 정착하지 못하고.. 뒤늦게 도전하겠답시고 계속 실패하는 바람에..
내 나이대의 사람들만큼조차 돈을 모으지도 못하고..
마치 물 위의 부표처럼.. 직급 차이 때문에 같은 회사 내에서도 뭔가 홀로 떠돌아다니는 것만 같은 나에게..
그 말이 묘한 위로가 됐다.

신은 공평해서 고생 끝에 낙이 올거라는 말도..
회사 그만두지 말라는 말도.. ㅎㅎ

다 그냥.. 조용한 위로가 됐다.


가끔은 회사 화장실 한 구석에서 쭈그려 앉아서.. 내 불안한 미래 때문에 숨죽여 울기도 했었는데..



2022년이 끝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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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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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꿈의 대장정을 2주 전에 마무리했다.
결과는 실패였다.

서울 양재의 본사 10층 대회의실에서 본 최종면접이었다.
전날까지 무슨 질문이 나올지 몰라서 기대와 걱정, 불안을 한가득 안고 올라간 면접장이었다.
이 자리까지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던가.

그치만 최종면접의 9명 사이에 끼어서,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다시 돌아보면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남들은 본인의 경험과 매칭해서 대기업 최종면접자들 마냥 잘도 말하던데..
나름 면접을 많이 봤다고 생각했음에도, 면접관에 의해 말이 자꾸 끊기는 시간들 속에서.. 초조하고 두려웠다.
면접장에서 면접에 대한 답변을 했어야 했는데, 자꾸 스스로에 대한 변명만을 답하게 되었던거 같다.

다른 면접자들 답변을 들으면서, 스스로가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는 영자신문을 쓴 경험이 있고, 누군가는 논문을 썼고..
누군가는 무역에 대한 경험이 있고..
누군가는 여러 해외경험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꾸만 스스로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는데.. 잘 살지는 못했던것만 같아..
어쩌면 열심히 살지도 못했던 것만 같고..

보통 면접을 보면.. 잘 봤다는 예상은 빗나갈 때도 있었지만..
망했다는 예감은 어김없이 틀린 적이 없었다. 나는 그 날의 마지막 그룹이었기 때문에..
면접장을 나가는 길은 어느덧 컴컴해졌다.
다시는 이 근처에 올 일이 없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고, 면접 전에 긴장해서 음식 하나 삼키지 못했던 것들이, 그 회사 문을 나서자마자 엄청난 허기가 되어서 나를 덮쳤다.
그래서.. 나가는 길에 보이는 가장 첫 식당인 한 국밥집에 들어갔다.
가장 싼 국밥이 12,000원인걸 보고, 강남엔 국밥도 비싸네.. 싶었다.
밥을 먹는데 술 생각이 생각나서 맥주를 한병 시키고, 밥과 같이 먹었다.
면접을 말아먹었으니, 국밥도 말아먹어야겠다, 라는 생각이었다.
국 속의 고기와 소면을 꼭꼭 씹어먹고, 맥주를 한잔 들이켰다.

그때는 하루의 의지력이 다 바닥나 버려서, 혼잣말을 하면서 면접을 복기했다.
자책도 좀 했던거 같고..
이제는 다시 올 일이 없는, 국밥집 창가 너머로 보이는 많은 고층건물들과 도로, 걸어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을 눈 속에 넣기 바빴다.

그 사이, 나와 가까운 다른 테이블에서 누군가가 여러번 기침을 하기에, 설마.. 라는 불안함도 있었지만..
설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로부터 5일 뒤, 심한 감기몸살에 걸렸다.
아침에 일어나서 씻기도 어려운데.. 회사에는 가야 하니.. 부랴부랴 나가게 됐다.
고열과 기침, 두통, 근육통 등 때문에 너무 괴로웠으나.. 코로나 자가 키트에는 음성으로 나와서 단순 감기몸살인가 했다.
다음날 연차를 쓰고.. 집에서 누워있는데.. 오후 4시까지 일어날 수가 없어서.. 이대로는 내일 출근이 어렵겠다 싶어서 간신히 근처 병원을 갔다.
코로나 양성이었다.
6일을 내리 앓았고, 통증이 거의 끝나는 마지막날에 최종결과가 나왔는데, 역시 내 예상을 한치도 빗나가지 않는 결과였다.
머리로는 이해가 됐으나, 마음은 괴로웠다.

지난 14년간의 오랜 꿈의 성적표였고, 지난 3년간의 노력의 결과였다.
풍운의 꿈을 안고 배웠던 영어, 일어 같은 외국어부터.. 무역, 경제, 그리고 내 전공이었던 경영까지..
그리고 부수적으로 배워야 했던 NCS와 한국사까지..
참으로 얼마나 다양한걸 제로베이스부터 어느정도 실력이 되기 위해 그토록 많은 날들을 지냈던가..

그 모든 것들의 성적표 앞에서.. 나는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나는 83점일 뿐이었다.
172명 중, 최종 6명에 들어가지 못하는 실력일 뿐이었고..
사실 단순히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꿈의 크기에 비해 내 능력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그게 모든 사실의 전부였다.
회사는 감성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회사 일의 대부분은 이성과 수치로 내 능력치를 증명해야만 하는거니까..
나는 명백히 나를 객관적으로 입증시키지 못했던거다. 필요한 사람이라는 수치에 내가 맞지 않았던 것 뿐이다.
그냥.. 그 뿐이다.


코로나가 끝나고, 자취방 벽면에 물이 줄줄 새는걸 발견했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다.
회사에 다시 돌아갔다. 내 현실이 바뀌는건 없었다.
어쩌면 앞으로도 내 현실과 미래가 바뀔수는 없을수는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어서, 어느덧 작은 절망이 내게로 성큼 다가왔다.
인생이 나한테 일주일 단위로 너무 다이나믹한 감정을 경험하게 해줘서, 조금 헛웃음이 났다.

이런 나에게 내 옛날 오랜 벗은, 문자로 큰 위로를 건넸다.
똑같은 경험과 실패를 해도, 그 후의 선택은 내가 하는 것이라고. 그 동안 수고했다고..
지금의 실패에 너무 오래, 깊게 좌절하지 말라고..

그대의 상냥함에 그러겠노라 대답했지만..
사실은 이제 잘 모르겠다. 나는 능력도 없는 주제에, 내 딴엔 너무 오랫동안 고군분투했고..
작은 몇 번의 성공을 겪기도 했지만, 결국 여러 큰 실패를 겪어오면서 마음도 많이 다쳐왔으니.. 앞으로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밤이다..
이젠 인생을 잘 모르겠다. 그냥 나는.. 잘 모르는 인생을 그냥저냥 살고 있다.
이런게 인생이고 행복이겠지.. 나는 행복하다.

Posted by 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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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날들 동안 ‘언젠가 나도 행복해질 수 있을까?’라며 의문섞인 바람을 수없이, 여러차례 꿈꿔왔었다.

카톡 프로필에 내가 감히 갖지도 못할 행복을 보여주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고 질투나기 일쑤였다.

지금은… 그들이 행복하다면 그걸로 됐다는 안도감만 든다.

내일은 내 14년 간의 오랜 꿈이 모두 끝나는 날이다.
내일이 마침표가 될지, 새로운 시작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꿈을 품을 수 있어서 괴롭고 행복했다.

사랑은 괴롭고 힘든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는 일종의 내 오랜 짝사랑이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도 사람들이랑 씨름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저녁이 되고.. 내일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너무 울렁거려.

왠지 조금은 울고 싶은 기분도 든다.


너무 오랜시간 사랑했다.
내 인생의 나침반 같았다.
외면하려해도 결국 마음 한 켠을 쿡쿡 찔렀다.

한 달 전의 나는.. 감히 내일이 올거라고 생각조차 못했다.
단 몇 시간 뒤의 내 미래도 모르는 나는.. 참 얼마나 나약하고 작고 보잘것이 없는가.

또 오해영에 나오는 오해영처럼..
나는 내가 진심으로 잘됐으면 좋겠다.

나는 결국 나를 사랑했고, 내 꿈을 사랑했으므로.

물음표를 던지지 말고, 느낌표를 던지자.
나는 잘할거야.
인생은 한 치 앞도 모르니까 한 치 앞도 모르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어.

Posted by 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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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코트라 1차 면접을 보고 왔다.
6시간, 4번의 면접.

1차 영어면접부터 시작해서, 상황면접, 토론면접, PT면접까지..
20분의 메모시간을 주고 3분 발표에 3분 질의 응답,
토론면접은 20분의 준비시간에 42분의 발표.

이때까지 한번도 해본 적도 없는 면접을 처음 해보니,
면접장에서 말도 씹히고, 데이터를 빨리 정리하지도 못해서 조금 괴로웠다.

면접을 하는 도중, 긴장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고,
6시간동안 500미리짜리 생수 2병을 끝장냈지만..
면접 전에.. 이젠 더이상 학생이 아니라서 스터디 같은걸 준비할 수도 없었고..
면접 바로 전날까지도 나는 야근을 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면접을 보게 되어서 나는 정말 간만에 너무 행복했다.



10월 초의 어느 날,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코트라의 시험 결과가 나왔으니 확인해라, 네 수험번호는 02-00**이다.
설마 됐겠나.. 싶은 마음으로 검색해보니, 내 수험번호가 거기 있었다.
너무 놀라고 기쁜 마음에, 점심시간인 것도 까맣게 잊고, 옆에 후임에게 붙었다며 뛸 듯이 좋아만 했다.

그 뒤로 다가온 NCS와 인적성 검사..
처음으로 경제논술을 넘었다는 기쁨도 잠시..
인터넷 후기로 찾아본 NCS의 후기가 너무 어마어마했다.
그래서.. 후임에게 이건 도저히 자신이 없다며 한탄을 했다.
그랬더니 후임이.. “지인씨 이때까지 열심히 했잖아요. NCS는 다른데 가서도 많이 풀어봤고요. 이번에 잘할거에요.” 라며 위로해주었다.

막상 가보니.. NCS 기본서를 들고 온 사람들이 몇명 있었다.
나는 적어도 저 사람들은 이길 수 있겠단 생각을 했다.
왜냐면.. 내가 이때까지 푼 PSAT 문제집이 몇권이고.. 실전 문제집이 몇권인가.. ㅎ
그래도 사실은 너무 떨렸다. 90분 안에 120 문항을 풀어야 했으니까.
그치만.. 그냥 내 최선을 다하자고 생각했다.
후회만 하지 말자고..

그리고 엊그제.. 드디어 코트라 1차 면접을 보고 왔다.
6시간동안 계속 머리를 쓰고, 면접관 앞에서 내 의견을 펼치는 시간은.. 쉽지만은 않은 시간이었다.
영어도 안쓴지 1년이 넘어가는데 오랜만에 하려니.. 남들보다는 못하는 내 자신이 조금은 부끄러웠다.
실수도 하기도 했고..

막상 면접을 보러 가니.. 더 떨렸다.
시계가 없는 곳에서, 면접관의 말만 듣고 시간내에 요점만 정리해서 면접장에 들어가는 것도 힘들었고..
발표면접과 토론면접은 준비만 연달아서 20분씩 총 40분간 머리를 싸매고 요점을 정리하는것도 어려웠다.
면접장 안에 들어가서 내 의견을 펼치고, 면접관으로부터 문의가 들어오는걸 응대하는것도 쉽지는 않았다.

그치만 행복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상관하지 않고 간만에 속이 후련하고 행복하기만 한 면접은 처음이었다고 생각한다.
내 젊은 날의 꿈에 기업에 지원하고자 했던 오랜 사랑이.. 어느정도 이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코트라 경제 논술에도 붙어봤고.. 1차 면접까지 가봤으니..
정말 경쟁하고 싶었던, 나와 같은 목표를 향하고 있던 쟁쟁한 친구들과 같은 공간에서, 그것도 코트라 실무진들 앞에서 겨뤄봤으니..
그것만으로도 지난 날의 내 세월이 모든게 다 헛되지는 않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무척이나 감사했다.

4년 전에는 코엑스 4층에서 키타에서 진행했던 무역실무과정을 배웠는데,
4년 뒤에는 코엑스 3층에서 코트라 NCS랑 1차 면접까지 보다니..
이런 일이 생길 줄 내 인생에서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ㅎㅎ

사실 한편으로는 프로듀스 101의 지원자 중에 한 명이 된 듯한 느낌도 들었는데..
24명까지 올라간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172명으로 시작해서 24명 안에 들다니..


1차 면접까지 오다니.. 정말 행복했고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이 소중한 기회를 주신 코트라 관계자 여러분과 인재경영실 분들에게도 너무 감사드려요.
항상 행복하세요.
저도 행복할게요..

Posted by 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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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주 주말에는 부모님과 동생과 식당에서 장어를 먹다가 문득 울어버렸다.
아빠는 또, 이렇게 아등바등 살지 말라고.. 젊은 날 금방 간다고.. 즐기며 살라고 했다.
같은 레파토리의 반복이었다.

그 말을 듣고 서러워서 갑자기 눈물이 났다.
어차피 죽을 인생이라면 차라리 이 청춘이 다 빨리 지나가서 빨리 죽을 날이 오면 좋겠다고..
인생을 열심히 산다고 사는데.. 왜 내 인생은 변하는게 없고 구질구질한지 모르겠다고..
서럽게 펑펑 울었다.
요즘 회사에 가면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하다..
누구는 옆에서 승진 안시켜준다고 몇달동안 같은 레파토리로 말하고..
누구는 한달에 200도 채 받지 못하는 나한테.. 언제까지 하위 99%의 마인드로 살거냐며 훈계하고..
티나지 않는 일을 열심히 하는건 의미가 없다.. 뭐 그런 류의 이야기들.. 회사에서 사람을 비용으로 생각하지 말고.. 인력으로 생각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한게..
졸지에 또 우스운 말이 됐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인재 육성으로 보셔야지.. 단기적인 관점에서만 보고 사람을 cost로만 생각하시면 안된다..
라고 말한게 나는 이게 왜 루저의 관점에서 말했다는 건지 백번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내가 배운 경영학의 인사분야들은.. 그토록 핵심 인재를 육성하는 방법에 대해서 학문을 구축하고.. 학생들한테 가르치던거였는데..
경제학에서도.. 사회의 비정규직이 늘어날수록 소비는 감소되고.. 소비력이 줄어드니 기업의 투자도 감소하고.. 결국 저물가 저금리 저성장이 지속되면 유동성함정에 빠질 우려도 있는데..
나는 실무를 잘 몰라서 이러는걸까?
내가 너무 이론에만 집착했던걸까..

어쩌면 정규직도 아닌데 너무 큰 욕심을 부렸던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갖고 있던 모든 꿈들도 다..
내가 부자도 아니면서.. 그냥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아등바등하던.. 쓰잘데기 없는 거일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그냥.. 회사에서 일 끝나면 집에서 잔다.
자는 시간이 많이 늘었다.
유튜브에서 자는 시간이 많이 늘면.. 뇌가 죽고 싶은거라 하던데..
나는 참 어지간히도 이제 지치고.. 인생을 끝내고 싶나보다. 이제는 회사사람들이 하하호호 얘기하는거에도 끼고 싶지 않다.
내 일은 의미 없는 일이라 한다.
내가 일이라며 데드라인에 맞추기 위한 그 모든 일들은 모두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지금도, 예전도, 다 마찬가지였겠지. 그래서 나는 좀.. 많이 죽고 싶어졌다.
이제는 무언가를 새로 하고 싶다는 의욕도 없다.
공부해야 하는데.. 기운을 너무 많이 빼았겼다.
다른 기업들도 이런 나라면 안좋아하지 않을까.. 이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자신이 없다.

곧 토익 만료 되겠지.
나는 앞으로 30년동안 이 회사에서 이 직급에서 평생 이렇게 뒤치다꺼리하는 일만 하다가 죽겠지.
참 희망이 없는 개같은 인생이다. 이래서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니까. 가족들이 보고싶다.
앞으로 일을 열심히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냥 이제.. 지쳤어..
일도.. 사는 것도.. 인생이 너무 절망적이고, 재미가 없다.
나는 항상 지는 게임만 하는… 어쩔수 없는 99%의 인생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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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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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초와 중순에는 다양한 일이 있었다.



1.

일단.. 회사 일부 구역에 물난리가 났었다.
야근을 하느라 저녁까지 남아있었는데..
물이 터져서 같이 야근했던 과장님이랑 허겁지겁 내려갔다.
가보니까 이미 천장에서는 물이 콸콸콸
교대근무자들이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하나 당황하면서 뭐라도 하려는 상황이었다.
일단 흐르는 물이라도 막아보자.. 라는 느낌으로, 어디선가 구해온 거대한 김장김치 담그는 용도와 비슷한 비닐을 가지고
천장의 물을 막고.. 물을 빼내려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다들 온 몸으로 그 물을 다 맞아야 했다.

나도 그 사이에서 뭔가 하려면 좋으련만, 나는 애석하게도 일평생 엔지니어랑은 상관이 없는 공부와 업무를 해서 그런지..
할 수 있는게 별로 없었다.
물을 같이 비닐로 받아내다가.. 무겁고 중심을 못잡아서 기껏 받은 물이나 다 쏟아져서 나는 소리나 지르고.. ㅎㅎ.. ㅠㅠㅠㅠ
그래서 가운데서 잔심부름으로 보안팀에서 열쇠나 받고 문이나 열고..
흐르는 물들을 미화팀에서 빌린 스퀴저로 긁어내고..
바닥에 있는 물을 연신 습식 청소기로 빨아들여서 긁어냈다. 그래도 각 공종별 특징이 잘 나타나서 그 바쁘고 긴박한 와중에 내심 한 편으로 슬그머니 웃었다.
전기 쪽은 천장 텍스 젖는데 전기 감전 사고 나면 어떡할지 걱정하고..
공조 쪽은 그 와중에 일하는데 시원해야 한다고 에어컨 틀어주고.. ㅎㅎ
소방 쪽은 소방호스 찾아와서 누수된 물을 배출할 통로도 만들어주고.. 여튼 도중에 가구들이 침수되는데 어느 한 명이 멀티탭이 젖으면 어떡하냐 해서,
허겁지겁 내가 그 근처 물을 닦아내면서 다른 한 명이 멀티탭을 들었는데..
멀티탭이 물을 먹어서 들자마자 꺼졌다.
그거 보고 경악해서 또 소리질렀는데.. 그런거는 안전 상에는 문제가 없다는 말을 들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할 수 있는게 별로 없어서.. 청소만 열심히 하느라 도중에 집에가서 새벽 1시에 갔지만..
다른 분들은 원인을 찾고 그 사태가 마무리 될 때까지 새벽 4시까지 있다가 갔다. 그 때 사실 조금의 무력감을 느꼈던거 같다.
무언가 사태가 터졌는데 내가 실질적으로 그쪽 방면에는 아무 지식이 없어서 아무것도 못한다는.. 지금 일하는 이 부서는.. 가끔 나만 별나라에 떨어진 듯한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다들 전문성을 갖고 일하는데.. 나는 여태껏 일하면서 제대로 된 전문성을 살려보질 못했으니..
그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하지만 그 날은 그 부러움보다, 스스로에 대한 무력감과 부끄러움이 조금 더 들었던 날이었다.



2.

사실 1.의 사건이 있을 때, 내가 야근을 했던 건 다른 이유였다.
최근의 나는 고래싸움에 끼어있는 새우였다.
새우인 나는 연신 등이 터져가고 있었다.

현재 근로 조건 중의 한가지를 두고, 노조와 사측이 일방적으로 변경을 요구하던 참이었다.
정작 부서 내에 다른 동료들은 대다수가 반대하던 건이었는데..
그거를 막아보겠다고 팀장님을 비롯한 부서 내의 다른 상사분들과 회의하여 결과를 냈지만..
그걸 실질적인 정보로 꾸리는건 내 몫이었다.
어쨌든 그래서 8월 첫째 주는 사측을 설득위한 정보를 꾸리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했고..
거기에는 어느정도 효과가 있었던 듯 했다.

그러나 8월 둘째 주에는 노조를 위한 정보를 제공해야 했다.
어떻게 해야 최근 몇 달간 지속된 노조의 요청을 막을 수 있을까..
정작 동료들이 반대하는 일이라면 나는 어떻게든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걸 막지 못해서 일어났던 일은.. 이미 전 회사에서 한 번 겪었으면 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두 번 다시 비슷한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작정한 터였다.
또한, 나는 비록 엔지니어의 업무를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내가 인사분야에 전문가도 아니지만..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는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하지만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이라 너무 막막했다.
우리의 주장은 명확했지만 그 근거를 찾기가 좀.. 어려웠다.
인터넷 상에서 각종 근무형태에 대한 조직행위의 데이터를 찾고..
국가법령정보센터에서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 산업안전보건법, 중대해재처벌법 등의 법조항들을 찾아다니며 근거를 꾸리려 했다.

근무시간부터 정보를 수집했던 일은 어느덧 11시가 되어서 방향이 잡혔고
새벽 1시에 개요가 잡혔고, 4시가 되어서 내용이 총 정리가 됐고, 서식을 다 잡고 다 끝내니 5시였다. 그 날 오전, 결국 팀장님께 보고했지만..
정작 이번에 실제로 쓰이는 정보는 그 중의 일부분이었다.
그래도 수고했다 해주셨다. 일부분이어도.. 내가 정리한 자료가 제때에 쓰인다는건 참 다행이고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과업을 완벽하게 달성했어도 타이밍을 놓친다면 그건 완벽이 아니고.. 쓸데 없는거였다는걸 나는 여러 경험으로 뼈저리게 느껴왔었으니까..
조금이라도 적절한 정보였어서 타이밍에 맞게 쓰인다면.. 그걸로 됐다.


3.

그래서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결국은 공부를 제대로 못했다는 변명을 하게 됐다.
별 이변이 없다면, 이번 시험이.. 내 생애에 코트라 입사 시험을 보는 마지막 날이 될 터였다.
애초에 이번에는 안될거라 생각했으니..
코트라만 정하고 시험공부를 한 것은 아니었으니..
코트라만 생각하고 죽어라해도 붙을까 말까한 곳이니..
당연히 나는 붙을 일이 없을 터였다. 하지만 나는.. 이제는 오랜 꿈을 끝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과정이 다른 수험생들처럼 ‘옳은 길’을 ‘정석대로’ 가는 방법을 하진 못했다.
미시,거시,국제경제를 공부하고 경제신문을 읽으면서 현 시세를 익히고 필기를 합격하는게 정석인데..
나는 그 정석을 결국 해내지 못했으니까. 막판에 회사에 뒤늦은 여름휴가를 내고 집에서 공부했다.
하지만 나 스스로가 생각해도 여전히 부족했다.
그래서 시험보기 전 날 밤에.. 그냥 시험보러 가지 말까 생각했다. 하지만 2년 전에 코트라에 시험을 보며 느꼈던 감정이 있었다.
나는 그 날도 분명히 시험에 떨어질 거란걸, 알고 갔다.
미시,거시 경제를 1회독 밖에 못하고 갔고.. 경제신문은 제대로 읽지도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20대 때부터 내 막연한 꿈이었던 기업의 필기 시험을 보러 갔던 것이 너무 감격스러웠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시험을 끝나고.. 감독관이 위로의 말을 해줬던 것 같다. 오래되어서 잘 기억은 안나지만..
시험 보느라 고생했고 좋은 결과 있길 바란다고..
만약에 이번에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대도.. 다음에 좋은 기회로 다시 보자고..
그래서.. 어차피 내 오랜 꿈을 끝내려면 시험장에 가야만 했다. 새벽 6시 첫 차를 타고 8시에 시험장에 입실을 했다.
시험을 보기 막판까지 핸드폰으로 경제내용을 다시 훑고.. 최신 경제 정보들도 한번씩 훑고.. 시험에 임했다.
이번에 본 경제논술과 직무역량시험은.. 2년 전과는 달리,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다 적을 수 있었다. 나일롱으로 경제를 공부하고 신문을 읽었어도.. 꼴에 경험이라고 어느덧 답안지에 쓸 말이 잔뜩 생겼다.
그리고 몇 달 간 이 기업, 저 기업 시험에서 논술을 쓴 경험이 있다고..
둘 다 시간 내에 논술 답안작성을 끝내긴 했다.
사실 경제 논술은.. 5분만 더 있었다면 좋았을걸.. 이란 생각을 했지만..
그래.. 경제 논술은 사실 시간이 조금 부족했다..

여하튼 시험 도중의 휴식시간이나, 시험이 끝나고 교실 문을 나서기 전에도..
한참이나 시험장 구석구석을 돌아봤던거 같다. 이번이 마지막인걸 여실히 느껴서 그런지..
이 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했다.
시험이 끝났다는 말은, 어느덧 나는 내 꿈의 씁쓸한 결말로 또 성큼 다가간 것이기 때문이다.
시험이 끝나고.. 책상에 내 수험번호가 쓰여져 있던 라벨지를 기념으로 챙겨 나가면서..
집에 가려고 길을 걷는데 왠지 눈물이 찔끔찔끔 나왔다. 시험을 본 직후에 바로 울었던건.. 실로 수능 이후에 처음으로 있었던 일이었다.

20대 내 막연한 꿈의 끝이었다.
20대 때, 너무 막연하게도 ‘나는 아마 안될거다’라며 지레짐작하며 포기한 회사였다.
하지만 그래도 막연한 꿈은, 이상하게도 해외 한번을 나가본적이 없는 나에게.. 20대동안 외국어를 공부할 수 있는 동기를 만들어 주었다.
30대 초에 퇴사를 하고 이직에 여러차례 실패했을때..
어느 덧 문득, 내가 가진 스펙이 그 회사의 서류전형에는 통과할 정도로 바뀌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차피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중소기업들은 내 나이와 관련 경력의 부족을 이유로 이직을 거부하는데..
그렇다면 이제는 힘들어도 그토록 가고 싶었던 꿈의 기업에 마지막으로 도전을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시작도 전에 각오하고 시작했건만..
실제로 마주한 경제학은 너무 이해하기 어려운 것 투성이었다.
이해가 안되니 암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나는.. 부끄럽지만 남들보다는.. 공부에 특화된 지능이나 습관이 부족한 인간이었다.. 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 자신에게 의미는 있었다.
사람들은 흔히.. 어떠한 것을 성취하지 못하고 미련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어차피 이루지 못할걸 왜 하냐고.. 그러니까 내가 안된다고 하지 않았냐고..
그런데.. 지난 몇 년간의 경험을 하면서.. 지는 싸움이어도 해야만 하는 싸움이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그걸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스스로’가 하기로 정한 싸움이었다면 말이다. 비웃음과 응원 중, 주변으로부터 더 받았던건 비웃음이었다.
하지만 분명 그 와중에 조금씩 변하던 내가 있었다.
원하는 지점까지는 도달하지 못해도.. 내가 가고 싶었던 분야의 지식이 차츰 쌓이는게 있었고..
나에겐 사치였던 꿈과 희망을 품을 동안에는.. 그래도 잿빛이었던 내 인생이 조금은 컬러풀해진것만 같았다.

하지만 꿈을 품고 산다는건 마냥 행복한건 아니었다.
목표치를 도달하지 못한 내 모자란 현실을 마주해야 했고..
항상 도착점에 도달하지 못할까봐 무수히 많은 불안한 밤을 보내야만 했다.
그래도.. 의미는 있었어..
사실 아예 슬프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나는 내 꿈에 도달하기 위해 살아봤다.
이번엔.. 이 마음만 가져가야겠다.

슬픔도.. 눈물도.. 어서 빨리 묻어둬야지.
인생은 원래.. 비가 그치는걸 기다리는게 아니라.. 엉망진창인 폭풍우 속에서도 춤추는 방법을 배우는거라 했다.
나는 내일도, 모레도 다시 폭풍우 속에서 춤을 춰야 하니까. 그러니까 오늘까지만 슬퍼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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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에는 3곳의 필기를 봤다.

한 곳은.. NCS가 상위 10%였는데.. 또 며칠을 더 마감일을 지나고서도 기다리게 하더니.. 결국에는 서류 탈락을 했다.
작년이랑 똑같구나.. 싶어서 웃음이 났다.
왜 상위 10%여도 필기 합격을 못하는걸까?

다른 두 곳은 NCS와 논술을 보는 곳이었다.

그 곳 중 한 곳은, 논술이 HR과 관련된 문항이 나왔다.
간만에 HR에 관한 내 생각을 논술로 적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10년 전의 나라면.. 분명히 좋아했을 터였다.
나는 내 전공 중에 인사분야를 너무 좋아했으니까.
그 당시만 해도.. 조직행위론, 조직구조론 등을 배우면서.. 만일 경영학에 마음이 있다면.. 경영의 4대 분야 중에 인사분야가 그에 해당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사실 회사에서 입사해서.. 한 구성원으로써 옆에서 지켜본 인사팀은.. 조금 다른 느낌이긴 했지만..
정리해고를 시킬 때 바로 눈 앞에서 사람을 짜르는 것도, 아이러니하게 인사팀이 대표해서 하는거니까..
뭐든 양면은 있는거다.
그래도 간만에 좋아했던 분야를 문항으로 만나서 내 의견을 쓸 수 있다는게 반갑고 좋았다.
비록.. 나는 HR을 꾸준히 판게 아니라서 올바른 답을 적기에는 힘들었지만..
결국 필기 합격선과는 5점차이로 떨어지고 말았다.

다른 한 곳은.. 논술 문항이 농업과 무역 관련한 문항이 나왔다.
이 곳은 필기도 붙고, 면접도 갔다.
가는 길에 내 차가 도중에 부셔질뻔했지만.. 그건 차치하고..
오랜만에 면접장에서 영어를 쓰려니.. 영어가 잘 안나왔다.
그도 그럴게.. 영어를 제대로 안쓴지 벌써 2,3년이고.. 그 사이에는 CNN이나 BBC 셰도잉만 했으니까.
그래도 말이 안나온것 치고는 잘나온 편이었다. 배운게 완전히 증발하지는 않은거 같다.
가서 내가 평소에 본 신문기사와, 이때까지 배운것들을 이용해서 면접장에서 내 최선을 다했다.
그치만 그 주에는.. 다른 상사들을 서포트 하느라 계속 야근을 하던 편이라.. 그 회사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 알고 가지는 못했다.
업무분야도 내가 준비해왔던 분야와는 약간 다르기도 했고..

그래도 면접 때 어느정도 잘봤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 회사의 직원이 되지는 못했다.

이번에는 조금이라도 꿈에 가까워지나 했는데.. 결국 안됐구료 ㅎ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의 가까운 상사들은..
나를 응원해준다.
내가 이번 면접 잘봐서 왠지 감이 좋다고 했을 때,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근데 막상 간다고 생각하니 서운하다.’ 며 응원해주었다.
내가.. ‘나도 공부하면서 나 스스로를 못믿는데.. 어떻게 그렇게 확고하냐?’라고 물으니..
‘지인씨는 열심히 하니까 당연히 그럴줄 알았다.’며 웃었다.

결국 결과는 안좋았지만, 나조차 믿지 못했던 내 자신을, 누군가가 믿어준다는건 참 감사하고 좋은 경험이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좀 더 믿어보기로 했다.

다른 상사도 나를 불러서 본인의 이야기를 해주며 위로해줬다.
내가 혹시 우는건 아닌지 걱정도 해주고 ㅎㅎ
아직 기회는 있을거니까 조금 더 열심히 해보자고.. 화이팅도 해줬다.
그치만 한편으론 좀 더 같이 지낼 수 있게 되어서 좋다고도..
내 현 상황때문에 슬펐지만, 한편으론 그 분에 참으로 감사했다.


내 꿈의 유효기간이 만료가 되어가는 순간이 다가온다.
토익의 만료는 올해 12월 말.
토익스피킹도 내년 2월이면 끝나고..
아마 큰 이변이 없으면 올해 필기 시험을 볼.. 두 곳의 내 꿈의 기업에 도전하는건..
올해가 마지막이 될 터였다.

나는 아마 올해 안으로 원하는 곳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이제 외국어는 더이상 공부하지 않을 것만 같아.
가장 좋아했기에 어쩌면 쳐다보고 싶지 않을거 같기도 하다.
무역도.. 더 이상 안할거 같아..
그 때 되면 다른 마음이겠지만.. 지금은 일단 이래..

만약 인생이 영화였다면, 첫 회사를 퇴사하기 전,
여름 휴가비를 때려 넣어서 한국무역협회의 신입사원 무역실무과정을 들으러,
비 내리는 한 밤에, 중경삼림의 OST인 왕페이의 몽중인을 들으며, 고속버스를 타고 강남의 숙소를 찾아가던 나는..
벌써 어딘가의 삐까번쩍한 곳에서 날아다니고 있어야 할 터였다.


근데 인생은 다큐이고, 세상은 나보다 능력도, 노력도 더 많이 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어쩌면 내 자리는 없는게 당연하고, 있는게 이상할 터였다.
한 과학자는 그랬다. 우주에서는, 죽음이 당연하고 살아있는게 이상한거라고..
이 전 우주에서 살아있는 우리 생명체가 기적인거라고..
그것처럼.. 내 자리는 없는게 당연하고 있는게 이상하겠지.

근데 그렇다고 이때까지 내 젊음을.. 시간을 투자한게 다 허송세월이었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다.
결국 취업이라는 큰 성공은 하진 못했지만..
그 사이사이에 무역 자격증 취득이나, 외국어 향상이라는 좋은 결과를 맞기도 했다.
사실은 조금씩 나아지는 내 모습을 보면서 그래도 조금씩 행복했어..

경제학 공부하면서도 분명히 되게 많이 괴로웠는데..
그 뒤에 신문 읽으면 경제학적으로 눈에 띄는게 생겨서.. 사실은 조금 더 행복해졌어..

내가 사랑했던 내 전공인 경영학도.. 학부생 때 배우는 동안엔 행복했어..

내 능력이 그만한 깜냥이 안되어서 그렇지..
그래도 공부할때는.. 어쩌면 오늘의 노력이.. 내일의 변화로 이어지진 않을까..
희망을 살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모르는걸 일정 수준 이상으로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새로운걸 배운다는건 분명 괴로웠지만..
왜 나는 오랜 시간을 공부할 수 없을까.. 왜 내 체력과 끈기는 이따위밖에 안되나..
진짜 너무 괴로웠지만..


나는.. 내가 배워왔던 것들을 어느덧 조금씩 사랑하고 있었다.
설령 그 첫 시작은 취업을 염두해두고 했던 것이었을지라도.
남들의 능력보단 미약해서 성공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내 꿈의 유효기간이 만료가 되는 시점이 점차 다가오고 있다.
언제 내 나이가 이렇게 됐지? 싶을 만큼 가끔은 거울 속의 나 자신을 보고 깜짝깜짝 놀라기도 한다.
그래도 올 연말까지는 꾸준히 필기 준비를 밀고 나가려고 한다.
때로는 울고싶고, 때로는 다 안하고 싶어져도..

사실 경제학적으로 보면 결국엔 이게 다 매몰비용이다.
투자했고 결국 성공하지 못한 채 끝나버린 비용.
사실 매몰비용은 의미가 없어.

근데 나는 내 인생의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끝을 맞이할 준비를 하려고 한다.
그 끝이 짝사랑이었어도.
나는 이제 사랑하지 않는 방법을 잘 몰라.
그래서 그 마음이 사그라지도록 연말까지는 계속 해보려고..

이제 몇개월 안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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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를 한 지 2개월이 다 되어간다.
회사와 같은 지역의 국민임대가 되어서.. 최근에 혼자 살기 시작했다.
처음엔 집이 집같지도 않고 낯설었는데..
너무 적막해서 싫었는데..

이제는 내가 원하는 시간대면 언제든지 일어나서 공부도 할 수 있고..
나한테 이 나이까지 공부만 해서 뭐할거냐는 부모님 말도 안들어서 좋다.
그것만으로도 너무 좋다.

반면 최근들어 회사는 죽을맛이다.
나한테 업무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쓸데없이 거는 기대들이 너무 많다.
숨이 막혀. 팀 내에 어르신들은 나보고 자꾸 더 많은 업무를 하길 바란다.
팀 내에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상사들은 내가 어딘가의 정규직으로 이직하길 권유한다.

하.. 이래서 내가 외국어 한다는거 오픈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쩌다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됐다.

날이 가면 갈수록 내가, 회사속에서도 우스운 사람이 되는구나, 싶어서 어처구니 없기만 하다.

열심히 준비해서 이 회사의 정규직으로 이직하라는 조언도 많이 받았다.
그치만 나는.. 8개월 넘게 야근하면서 업무의 돌발상황에 대처하느라 개인 시간이 별로 없었고..
그 다음에는 이젠.. 보편적이지 않은 과목을 공부하는거에 이골이 났다.
왜냐면.. 안됐었으니까.
한번 안되면 언제 또 기회가 올지도 모르는 나날들을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해야 하고..
그 날이 온다고 해도, 내가 그걸 잘할 자신이 없다.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의 원하는 곳을 입사하지 못해서 상처받았던 내가..
꿈을 막연하게 쫓으며 조금씩 무언가를 하던 내가..
또다시 어딘가를 들어가기 위해서.. 기존 공부를 버리고 또 새로운걸 일정수준으로까지 올리게끔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아직까지는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4월에는 폴리텍대,
5월에는 한국법제연구원과 울산경제연구원의 필기시험을 봤다.

폴리텍대와 내 점수의 합격 차이는 4점차이였다.
작년의 2점차이에 비하면 좀 더 벌어진 수치였다.
한국법제연구원에서는 회계 논술을 봤는데.. 당연히 내가 잘 볼리가 없던 터였다.
그래도 ncs만 놓고 봤을때는.. 작년의 한국한의학연구원보다는 좀 더 수월했던거 같다.
울산경제연구원에서는.. 경영과 회계를 시험 봤는데..
그래도 최근에 전산회계 1급 공부를 했었다고.. 회계 문제는 평이하고 수월했다.
경영 문제는 좀 더 범위가 좁고 세밀하게 나왔던거 같다..

내일 모레 또 다른 곳에 시험을 봐야 해서 오늘도 공부를 더 해야 하건만..
나는 또 자괴감에 사무친다. 이번 5월부터는 경제 신문을 구독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매일 보지도 않는 신문을 뭣하러 돈 낭비하며 구독하냐는 엄마의 말을 더이상 듣지 않을 수 있어서, 이기도 하고,
월 25,000원짜리 한국경제 신문을 구독하면.. 월스트리트저널을 같이 구독할 수 있다는게 좋았다.
기사를 보면서 논조가 나랑은 안맞는게 많아서.. 기사를 읽을때는 필기를 하면서 읽고 있다.
그리고 며칠동안 신문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키워드가 뭔지를 찾아가며 보고 있다. WSJ은 회사에서 틈틈이 쉴 때마다 하나의 경제아티클을 정해서 읽고 있다.
내가 영어로 된 경제기사를 과거에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는.. 영어를 못해서라기 보다는 경제 지식이 부족했다는걸 알게 됐다.
최근에는 경제기사의 많은 부분이 이해가 되어서.. 조금은 기뻤고 다행이었다.

그치만 그마저도 최근 일주일은 내일모레 볼 시험때문에 한글과 영자신문을 아예 보질 못했지만..
그리고 최근에는 유튜브의 cnn10 채널을 구독하면서.. 하루에 1개식 셰도잉을 하고 있다.
예전엔 정식 서비스를 해주지 않았었는데.. 자막도 안나왔고..
요즘엔 정식 채널도 있고.. 자막도 켤 수도 있어서 좋다.
참.. 마음만 먹으면 외국어 공부하기 좋은 세상이다.
코트라와 aT를 지원하는건 올해를 마지막으로 끝내기로 했다.
올초에.. 내가 현재 나이가 34살인걸 생각하면서..
죽기 직전에 가장 후회할게 뭐인거 같은지 생각해본적이 있다.

이 시기에 누군가를 만나서 연애하고 결혼하는걸 못하면 후회할 것인가..
아니면 원하던걸 끝까지 노력하지 않고 도중에 멈추는걸 후회할 것인가.. 토익 900점을 넘기려고 아등바등하던 내가 있었다.
혹시라도 아등바등하며 무역자격증을 따던 내가 있었고..
20대 내내 틈틈이 외국어 공부하던 내가 있었다. 사실은 안다. 꿈을 버리지 않고 내 나름의 끝을 보겠다고 하는거는 미련한 짓이라는거를.
나에게 갑작스런 큰 행운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는 올해에도 당연히 분명 그 두 회사에 붙지 못할 것이다.
실력이 남들보다 안되니까, 노력을 남들보다 덜했으니까.
그러면서도 불안하다고 경제학을 더 자세하게 공부하긴 커녕, 괜히 다른 전공과목 공부하면서 삽질 중이니까.
또 다시 상처받기 싫다고 다른 회사에도 이력서를 다 내고 있으니까.

그치만 이제는.. 타이밍이 안맞게 너무 오래 품어서 썩어버린 꿈을 버릴 때가 되기도 했고..
내가 만약 어딘가의 정규직이 못되어서 평생 이 임금으로만 먹고 살려면..
이제는 스스로에 대한 기대나 희망도 버려야 할 때가 되기도 했다고 생각한다.
자기 주제도 모르는 주제에, 쓸데없는 기대나 희망을 가져서 이상향만 높이는건, 스스로에 대한 열등감만 커져.
그건 내가 어렸을때부터 해봐서 잘 알지.
그거 하기 싫어서 시도는 이것저것 해봤는데도 안되는것도.. 잘 알아.
나는 내 주변의 사람들이 한마디씩 던지는게 너무 아프다.
그 사람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서 내 온 몸을 찌른다.
가족도.. 직장동료도.. 사라지고 싶다.

야근을 안하기 시작한지 불과 보름 밖에 안둔 나를 두고..
대표는 내 일을 일로 안볼거라고.. 다른 예체능 출신의 누군가가 해야할 일을 맡기려 하면서.. 나를 감자칼과 사시미칼로 비교하는거 말고..
내가 같은 직급의 동료 생각하면서 더 일을 안가지려고 치욕스럽게 일을 그만 달라고 말해야 하는 상황도 싫고..
일이 점점 없어져서 월급 루팡하는 짓도 싫고..
남들이 나를 치켜 세우는것도.. 깔보는 것도 다 싫어..
나는 내가 잘나건 못나건.. 항상 그대로의 나일 뿐인데.
만약 세상에 나 혼자만 있다면, 나는 남들을 의식할 필요가 없을텐데.

그냥 이제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
또 다른 김지인은.. 어쩌면 또 다른 평행우주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겠지..
그 수 많은 경우의 수 중에.. 어쩌면 어떤 김지인은 모든 역경을 이뤄내고 결국 원하는 꿈을 이루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을까.
이제는 그거면 됐지, 싶어.
내가 못했어도, 어느 우주의 김지인은 해냈다면.. 행복하다면..
나는 이제 사라지고 싶다.
남들의 새털처럼 가벼운 그 한 마디가, 그 기대가,
나한테는 너무 아프고 무거워. 회사에 출근하는 것도,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모두 두려운 밤이다.



Posted by 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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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했는데.. 내 일은 일이 아니었다.
또 대표가 사람을 줄인다면 나라는 말을 들었다.
정작 팀장님은 아니라는데.. 열심히 잘 하고 있다 했는데..
근데 관리자 입장에선 그게 안보일거라며..
나보고 일을 더 해줬으면 좋겠다 했다.

정년까지 승진도 임금도 안오르고..
그냥 그저 그렇게 만족해야 하는 일인데..
내 월급 좀 줄어드는걸로 회사가 어마어마하게 번영할 예정인가보다.

이젠 싫어.
같은 직위의 다른 동료 눈치보는 것도..
윗사람들 눈치 보는 것도..

왜 보상을 더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라도 덜 받으려고 하다가 이 얘기까지 들은걸까.
내가 이때까지 어떻게든 해내려 야근해가며 아등바등했던건..
일이 아니었구나..

오늘은 배신감에 사무치는 날이다.
노력은 항상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배신하고야 만다.

승진도, 보상도 없이.. 최저임금으로 평생 살아야 하는데..
나보고 자꾸 인어공주가 되라고 한다.
열심히는 하되, 아무런 보상 없이 자꾸 물거품으로 사라지라고 한다. 그냥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
설마하니 34살까지 자우림의 팬이야를 듣고 스스로를 위로하게 될 줄 몰랐어.
이 때쯤 되면.. 그래도 경제적으론 나아질 줄 알았는데..

오늘 밤은 뼈저리게 사무치는 실패자의 밤이다.
나는 또 회사에서 거부당했단 마음에..
너무 마음이 아파..
나는 그냥.. 어디서든 나사와 볼트구나..
인생으로 놓고 봐도.. 옆에 아무도 없고.. 아이도 없고..
이젠 희망이 없어..

저번주부터 자꾸 마음이 상한다.
자존심은 나한테 사치인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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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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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로운 후임의 출근

이번 달에는, 기존의 나와 같이 일했던 선임이 육아휴직을 들어가고, 새로운 계약직 후임이 들어왔다.

그래서 3월 초에는 무지하게 바빴다.

3월 둘째 주 토요일에는 모 공기업의 필기시험이 예정되어 있었고..
나는 행정 전공자가 아닌데도 행정과 NCS를 봐야 했으니까..

그러는 한편, 새로운 후임에게 업무를 알려주느라 애를 먹었다.
기존의 선임이 갑작스레 코로나 양성이 떠서 한동안 출근을 못했기 때문에..

그래서 업무를 봐주고.. 원래 선임의 업무를 하면서도.. 행정 공부를 하는게 너무 힘들었다.

그래도 나보다 7살은 어리지만.. 꽤 참한 친구가 들어왔다.
아직 같이 지낸 지 한 달도 채 안됐지만, 성실하게 업무를 하려고 하는 자세가 되어있는 친구라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전 화이트데이 때는.. 내가 카카오프렌즈 춘식이를 좋아하는 걸 알고.. 춘식이 쿠키를 사다 줬다.. ㅎㅎ

먹을걸 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ㅎㅎㅎㅎㅎ




2. 3월 둘째 주의 시험은 결국 보지 못했다.

시험을 보지 못한 것 자체는 사실 안 좋은 일이다.
지난번에도 한번 보러 갔던 곳이었고..
지난번에도 카카오톡 알림톡으로 잘 받고 잘 갔던 터라, 알림톡만 믿었던 것이 패착의 원인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입실 시간에 5분 늦어서 결국 입실을 못했다.
지난번에는 알림톡에 입실시간과 시험시간이 같이 나왔었는데.. 이번엔 시험시간만 쓰여 있었고..
홈피에서 입실시간을 따로 봤어야 했는데..
나는 그걸 확인을 못했고..
제 아무리 3.1절, 대통령선거일, 야근 등을 하면서 열심히 행정 공부를 해도.. 결국 입실을 못하면 끝이니까 ㅋㅋㅋㅋㅋㅋㅋ
결론은 그래서 망해따…🌟


시험은 한 대학 부지 내에서 치뤄졌는데, 오랜만에 그 학교의 중앙도서관의 리모델링 공사가 끝난걸 알게 되었다.

학교에 다닐 때 한 겨울날을 포맨의 baby baby나, 샤이니의 JoJo를 들으며 거닐었던 곳이었다.
18년도에는 회사를 다니면서 중간,기말 준비하는 학생들 사이에 끼어서 자격증을 공부하던 곳이었고..

간만에 갔던 도서관은.. 내가 알던 매점은 사라져 있었고..
열람실은 배치 자체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엘리베이터도 리모델링 됐고..
한편으론 좀 서운한 감정도 느껴졌다. 지하를 내려가니, 요즘 분위기로 달라진 광경이 펼쳐졌다. 요즘 학생들은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공부를 하는구나.. 새삼 조금 많이 부러워졌다.

그 곳에서 그냥 거대한 책장에 디스플레이로 꽂혀진 폐기도서 한 부를 집어들었는데, 제목이 태평양 전쟁 하의 조선이란 책이었다.


내용은.. 1942년 당시의 일제강점기 하의 조선에 대한 회계처리 내역과, 그 당위성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저자는.. 조선의 회계에 관해서는 우리나라나, 북한에는 자료가 있지만.. 일본에는 사료가 남은게 없어서 연구자료로 제작했다고 했다.
읽어보면 참.. 열받는 내용이 종종 나왔다. 5년동안 조선에서 세금을 종전의 몇십 배나 걷었는지 나오게되고..
조선은 상공업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마치 본인들이 식산흥업 등을 통해서 도움을 줬다는 식의 내용이 나오기도..
대놓고 황국신민의 일원으로서 내선일체를 위해서 세금을 점차 증세하여 대일본제국에 기여한다고 적은 구절도 있었고..

해당 내용을 일어 원문으로 보니.. 학교 근현대사 시간에서 배웠을 때와는 또 다른 분노가 올라왔다.

그리고 당시의 회계 장부도 나왔는데..
이거는 내가 회계 전공이 아니라서 이해가 잘 안됐고..
물론 난 일어 전공도 아닌지라.. 대략적으로 이 정도까지만 이해했는데도 진심으로 너무 화가 났다.

비록 내가 일어를 이런 이유로 공부했던건 아니었는데.. 가끔 일제강점기 자료(?) 등을 보면.. 읽어보면서 깜짝깜짝 놀라는게 생긴다.

대전 옛 충남도청에 가면.. 대전 역사에 관한 사료를 전시한 곳이 있는데..
거기에는 사실.. 한글로 적어놓진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대전에 신사를 지어놨던게 사진 자료로도 남아있다..

소제동에 있던 연못을 메꾸고 그 위에 대전신사를 지었다는거 같던데.. 너무 오래되어서 위치까진 정확하겐 기억은 안나지만..
여튼 신사 사진 밑에 뻔하게 ‘대전신사’라고 일어로 적혀있고..
그 때도 그거 보면서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는데..
또.. 몇년 전에 이중섭 미술전에 갔을 때는..
이중섭 화백이 자신의 일본인 와이프와 두 아들들에게 쓴 편지가 있었는데..
편지 번역본에는 두 아들 이름이 한국식 이름으로 적혀 있지만.. 사실 편지 원문에는 두 아들을 일본식 이름으로 불렀다는 것도 읽을 수 있었고..
아이들도 같이 읽으라고 편지의 대부분을 한자없이 히라가나로 썼다던가..
그래도 아내분이 한국어를 좀 했었던지.. 편지지 테두리를 ‘뽀뽀’라는 글자 (한국어인 ‘뽀뽀’라는 글자를 발음 그대로 카타카나로 썼다) 로 도배하다시피 한 부분에서 이중섭 화백의 사랑을 더 깊이있게 느끼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것들을 일어원문으로 읽으면서 느끼는 건..
그 나라 언어를 알면.. 번역본을 읽을 때보다 원문을 통해서 그 감정을 더 크게 느낄 수 있다는거..
그래서 좀 더 일찍 학부 1,2학년 때부터 외국어를 빨리 배우려고 접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들었다.

그냥.. 어차피 난 외국어 잘 못할거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할걸.. 이란 후회도 좀 들고..
여튼.. 이번에 저 일어 원문으로 된 책을 봐서 진심으로 개빡치기도 했는데..
간만에 외국어를 안쓰는 일이나 외국어와 상관 없는 공부와는 벗어나서, 외국어 원문을 읽으니.. 조금 기분이 환기되기도 했다.
근데 그래도 역사적으로 빡치는건 빡치는거다.




3. 회사와 같은 지역의 임대주택의 당첨

지금은 회사와 집이 편도 1시간 거리이다. 자가용으로..
나는 원래 행동이 좀 굼뜨는지라.. 아침에 씻고 화장하고 옷입고 나가려면 시간이 오래 걸려서..
출근 시간에 맞춰 나가려면 새벽 6시 전후로는 일어나야 지각을 하지 않을 수 있다.
특히 3월부터는 개학들을 많이 했는지.. 기존의 경로로는 출근 1시간이 지났는데도 몇번 지각을 해서..
과장님의 추천을 받아서 아예 경로를 바꿔서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작년 12월에 신청했던 임대주택의 당첨 사실을 얼마 전에 알았다.
지난 주에 집을 둘러보고.. 어제는 동생의 서울집에 가서 동생네 짐을 열심히 포장했다.
그 짐들은 대부분 내 새 집 (이라고 쓰고 LH 혹은 정부의 집)으로 옮겨질 터였다.
꽉 찼던 동생의 물건들이, 5,6개의 박스에 들어가면서 점점 방이 텅 비는걸 보니.. 내가 다 서운해졌다.
동생과 엄마는 멀쩡하다는데.. 왜 나만 서운할까..
역시 동생은 이과.. 나는 문과.. ㅋㅋ

여튼.. 기분이 좀 이상했다.
그리고 작고 소중한 내 월급으로.. 과연 독립이 가능할까.. 걱정은 된다.
혹여 앞으로 마이너스 인생을 사는건 아닌가 싶기도 해서 조금 불안하긴 한데..
그래도 새 집의 뷰가 좋아서 조금은 기대되기도 한다. 한편으론.. 기준만 충족하면 여기에 최장 30년까지 살 수 있는데.. 혹시 앞으로도 그 기준에 충족되어서 그렇게 살면 어쩌지.. 라는 걱정도 드는데.. 어떻게든 바꿔봐야지.




4. 새로운 폰으로 갈아탐

이번주 화요일에 갑자기 오랜 친구가 찾아왔다. 오랜 친구였지만 내 잘못으로 인해 한동안 연락이 끊긴 친구였다.
처음에는 그냥 방문한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내 액정이 깨진 아이폰 10을 참고 참다가 바꿔주러 오려고 겸사겸사 온 것이었다.

그 친구와 둔산동을 돌면서..
나 혼자서 에전에 비해서 둔산동도 많이 바뀌었다고.. 신기해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서운해하기도 했다.
예전에 갔던 뉴욕뉴욕이란 파스타 집은 사라지고.. 그 자리엔 롤링파스타가 생겼다.
예전에 갔던 맥도날드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프리스비가 생기고..
공차는 그 자리 그대로였지만.. 모든 주문은 키오스크가 받고 있었다. 이렇게 회사에서 조퇴를 내고 그 친구와 밥을 먹고 카페를 갔는데..
카페에서 그 친구가 갑자기 아이폰 13을 꺼내며, 스타라이트와 핑크 색상 중에 고르라며 선택권을 줬다.


나는 핑크를 선택했다. 이뻤다 ㅎ.
하지만.. 이렇게 덥썩 핸드폰을 공짜로 선물을 받기는 왠지 마음이 안좋아서..
적은 돈이지만 약간의 성의표시를 했다.

친구 덕분에 4,5년된 액정 깨진 아이폰 10 대신에 아이폰 13을 받게 되었다.
속도도 빠르고.. 색상도 예쁘고..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잠금해제 되는게 너무 신기했다.
깨끗한 액정으로 사진을 보는게 얼마만이더라 ㅋㅋㅋㅋㅋ
카메라도 너무 좋았다.. 그치만 한편으론 아이폰10을 떠나보내면서 또 마음이 괜스레 뒤숭숭했다.
아직까진 작동이 잘 되는 폰이었는데..
오랜 시간을 나와 같이 보내던 폰이었는데.. 원래도 액정이 깨져있었지만..
천안에서 개고생하면서 3개월 일할 때..
회사 화장실 바닥에 몇번 떨궈서 액정 더 쫙쫙 나가도 그냥 애지중지하며 쓰던 폰이었는데..
맘이 안좋으면서도 새 폰을 만나서 좋은 이 기분 ㅋㅋㅋㅋ ㅠㅠㅠㅠㅠㅠㅠ

이번엔 진짜 잘 써야지..
나를 잊지 않고, 어느 날 불쑥 나를 찾아와준 이 친구에도 진심으로 고마웠다.
오랜만에 봤던 이 친구가 이제는 예전보다 행복하다는 근황을 전해와서 너무 기뻤다.
이 친구가 지난 세월을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알았던 터라, 앞으로는 잘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터였다.

한편으로는 이제 내가 잘 모르는 이 친구의 새로운 버릇이나 추억이 생겨서 조금은 섭섭했지만..
이 친구를 대전역에서 배웅하면서.. 나는 이 친구가 진심으로 행복해서 다행이고.. 앞으로 더 행복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친구가 새 아이폰 줬다고 알랑방구 뀌는거 아니다 ㅋㅋㅋㅋㅋ
나 그렇게 물질에 세속적인 사람 아니다 ㅋㅋㅋㅋㅋ



* 제 글보다 위 짤이 더 제 맘을 대변한다 생각하면..
그건 기분탓임당 ㅋㅋㅋㅋㅋㅋ ㅠㅠㅠㅠㅠㅠㅠ

여튼.. 그래도 다음번엔 내 돈으로 새 아이폰을 턱턱 바꿀 수 있는 재력을 가졌음 좋겠다.
역시 친구한테 고가의 물건을 선물 받는건 정말 감사하지만.. 미안하기도 한 감정이라서..

빨리 이직해야지.

Posted by 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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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2019년 5월의 내 달력..


사실은 1년 내내 있었던 일들을 달력에 기록했지만..
개인적인 일들도 기록했던터라.. 공개적으로 올릴수는 없고..
그냥.. 시험 직전의 5월 달력 사진만 올렸다.


엊그제는 간만에 책상 정리를 했다.
공부를 해야 하는데.. 책상에 무언가 물건이 너무 많아서.. 집중이 잘 안됐다.
하다보니까.. 2019년에 내가 썼던 달력이 나왔다.
‘미래가 불안하고 괴로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추억인 부분도 있었지..’라며 아주 살짝 웃었던 것 같다.

오늘은 간만에 칼퇴를 했다.
오랜만에 하는 진짜 칼퇴.
최근 한 달 반동안.. 잠은 잠대로 못자고.. 야근하거나 시험준비를 하는 통에.. 신경이 너무 예민해져 있었다.
어느 순간 또.. 집에 가고싶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고..
가끔은 또 죽고싶어졌고..
34살인데 적은 월급이 들어온걸 보고는 한숨만 쉬는 나날이 이어졌다.

하지만.. 오늘 칼퇴하고 저녁 7시부터 침대 속에 누워있으니..
이제는 죽고싶다는 생각을 좀..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사는게 힘들지 않아서가 아니다.
삶은 늘 힘들고, 나한테 도전이었다.

그리고.. 비록 내가 거창하게 무언가를 도전하는 성격의 사람은 아니었지만..
하고싶은게 있었고.. 그걸 위해서 꾸준히 해봤던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써..

삶이 어떤 방식으로든.. 행동을 하면 바뀐다는걸 알았다.
외국어를 한마디도 못하고.. 해외경험도 없지만.. 결국 영어랑 일어를 하게 되어서 레쥬메,커버레터를 쓰거나.. 일어로 된 이력서, 자소서를 쓰기도 하고..
내성적인 내가.. 영어라는 관심사로 모르는 사람들과 술을 먹으면서 친해져보기도 하고..
전공도 아니었던 무역 자격증을 따기도 하고..
결국 이번엔 취득에 또 실패했지만.. 전산회계 따려고 회계 공부도 좀 해보고..
원하는 공기업 가보고 싶다고 미시, 거시 경제도 해보고.. 비록 찰나였지만 그 경험은.. 경제 신문을 볼 때.. 조금씩 이해가 되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경험도 했다..
진짜 나는 내성적이고 말 수가 적었는데.. CS만 6년을 하기도 하고..

나는 어렸을 때부터 사는게 힘들었고.. 항상 절박했는데..
그래도 발버둥을 치니까 무언가 조금씩 변하기는 했다.
그치만 결국 원했던 공기업 정규직 취업까진 아직 가보진 못했지만..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요즘 표현으론 인생은 단짠단짠이 아닐까 한다.
어차피 나는 내일도 또 절박하게 살건데..
어차피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앞으로도 계속 그럴거면 죽고싶다는 생각은 그만하기로 했다.
삶은 변한다.
비록 내가 원하던 모습으로 항상 변하는 건 아니고.. 내 계획보다 더 늦어지기도 하고.. 내가 원했던 그 모습으로 꼭 나타나는 것만은 아니지만..
그래도 무언가 변하고는 있다.

그래서.. 죽고싶다는 생각은 이제 좀 그만 하기로 했다.
30년 가까이 했으면 이젠 됐어. 변해야지.

그치만 나는 내일 또 상처를 받을거다.
모레도, 글피도, 앞으로도 계속.
하지만 나는 바뀔거다.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그래서 결론은
나는 다 이길거야. 행복도, 불행도..
나는 사실 행복과 불행을 다 이길 수 있을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


2019년의 나는 정말 너무 힘들었다.
절망적이었고, 몸이 아팠고, 절박했고..
많은 자격증을 반년동안 땄는데도 백수였고,
영어회화를 왠만한 다른 사람들 수준으로 유창하게 할 수 있다는 걸 결국 알게됐지만 여전히 백수였고..
참 괴로웠는데..
얼마 전, 2019년의 달력을 다시 찬찬히 보니.. 그 때의 내가 애틋했다.

그래서.. 미래의 내가 보면.. 나는 또 애틋할 것이다.
나는 또.. 남들보다는 한참 늦은 청춘을 계속 살고 있다.

에일리가 SNS에 올렸다는 글처럼, 나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시차가 있다고 생각한다.

좋은 직장, 정규직에 다니며.. 결혼하고 아이를 놓은.. 내 비슷한 나이 또래의 누군가는..
화창한 날씨의 캘리포니아 오후 2시 반을 살고 있겠지.. 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나는.. 눈보라가 조금은 약해진.. 툰드라의 새벽 2시 반에서 3시를 살고 있다.

어차피 기왕 늦은거.. 1년 더 늦나, 2년 더 늦나 상관 없다..
지금은 그저.. 눈이 멎고 언젠가 동이 트길 바랄 뿐..
그걸 위해서 오늘 조금이라도 더 나아가는 방법밖에는 없다.
눈보라를 그치게 하는 것도, 새벽이 오게 하는 것도, 결국 나만이 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그만 죽고싶어하기로 했다.
나는 꼭 떠오르는 해를 봐야만 하겠다.

Posted by 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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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문 하나 쓰는게 왜 이다지도 어려울까.
맨날 야근하니까 엄마한테 틱틱대기나 하고..
엄마한테 넘 죄송하다..

Posted by 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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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1월 마지막주 주말부터 2월 초 설날 연휴동안 배가 아팠다.
사실 배가 수시로 아픈지는 3개월이 넘어가던 시점이었는데, 고3때부터 시작됐던 스트레스성 과민성 대장증후군은.. 내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가끔 도지고는 해서.. 이제는 그닥 큰 감흥은 없었다.
회사생활이나 공부나.. 스트레스를 수반하는거는 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1월달에 야근하면서 생애 처음으로 2개의 내부규정을 만드는 일을 하고..
그 사이에 각 규정을 몇 번씩이나 뜯어고치는 일을 했다..
그 중 하나는 결국 최종 승인권자의 승인을 통과하지 못했고.. 눈 앞에서 왜 내가 몇날 며칠 밤까지 남아서 준비했던게 통과가 안되는지..
최종 승인권자를 비롯한 다른 상사들 앞에서 다 까이는 경험을 했다.

그 일이 끝난 후..
내가 작성한 내부규정을 관리해준 상사가..
나를 따로 불러서 스벅에서 커피 사주면서 1시간 반동안 이런저런 얘기 해주면서 위로해주는데..
평소에 사적인 얘기는 잘 안하는 좋은 상사였는데.. 일부러 자신의 얘기까지 해주면서까지 위로해주시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여튼.. 감사.. 또 감사했다..

2월 설날 직전에는 또다른 상사한테..
내 지난 시간들은 결국 내 인생의 자양분이 될거라는 말을 들었다. 그것 또한 감사했다.
내 지나온 시간들이 다 헛되지 않았다는 위로였으니까.

그래도 1월에 힘들었는지.. 2월 설날 연휴 5일동안 배가 너무 아파서.. 핫팩을 끌어안고 전산회계 1급 공부를 했다.
1월동안 야근을 내내 해서.. 공부를 사실상 못했기 때문에..

2월 둘째주에는..
목요일에 발표를 하게 되어서..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3일에 걸쳐서.. 정규 업무시간 틈틈이, 그리고 그걸로도 모자라서 업무시간 외에도 일부러 시간을 내어서 발표자료를 만들었다.
올해부터 부서에서 월례회의를 하게 됐는데..
졸지에 내가 회의 관리자가 되어버려서.. 무언가 다음에 그 분들이 기쁘게 참석하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컸다.
그래서 회의 첫 스타트의 발표자가 내가 되자는 마음으로..
수요일 업무시간을 좀 넘은 시간까지 ppt 자료를 완성하고..
남들 퇴근 시간 이후에 세미나실에서 발표 연습 한 3번정도 하고.. 선물도 좀 챙겨볼까 해서..
부랴부랴 회사의 알바분에게 회사에서 가장 가까운 마트의 위치를 물어서.. 일부러 마트를 찾아갔다.

발렌타인데이라고 많은 초콜릿을 할인해서 파는 덕분에, 여러 초콜릿이랑.. 쓸데없는 선물을 추가로 사고..
집에가서 열심히 초콜릿을 한 25개 가량 포장했다 ㅋㅋㅋㅋ
다음날 발표를 했을 때, 의외로 내가 생각했던 것까지의 호응은 없었지만.. 그래도 많이들 즐거워해주셔서 다행이었고.. 나도 행복했다.. ㅋㅋ

- 내가 준 선물 고맙다고 보내온 인증샷 사진 ㅋㅋ -


그래도 그 주 일요일 오전 9시에 전산회계 1급 특별시험이 잡혀있던 터라..
부랴부랴 금,토에 케이랩 프로그램 사용법을 익히고..
일요일에 시험을 보러 갔는데..
엔터를 끝까지 쳐야만 입력된다는걸 잘 몰랐어서.. ㅎㅎㅎ ㅠㅠㅠㅠㅠㅠㅠ
문제2, 문제3의 총 12문제 분개 내용을 두번씩 다시 입력하고..
입력 잘됐는지 다시 체크하는 바람에..
문제 5의 결산문제 2문제는 아예 입력도 못하고 60분을 다 날려먹었다.
집에 와서 가채점을 해보는데..
입력만 잘 했으면 1,2점 차이로 합격할거 같은데..
나는 나를 완전히 믿지는 못하는지라.. ㅎㅎㅎㅎ
그리고 나한테는 얻어걸리는 운은 거의 없었어서.. 아무래도 4월 시험을 다시 봐야하나.. 생각이 들었다. ㅋㅋ ㅠㅠㅠㅠㅠㅠㅠㅠㅠ
결과는 3월 초에 나오니까.. 그 때까지 기다려봐야지..

여튼 꿀꿀한 기분을 가지고..
얼마 전부터 유튜브에서 열심히 광고하던 대만 로맨스 영화,
‘만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게 있어’를 보러 갔다.
근데 관객이 거의 없었다. 어쩐지.. 그 날에 상영을 딱 한 군데서 한 타임만 하던데..
근데 내가 기대했던건 ‘나의 소녀시대’인데..
실제로 그걸 보고나서 든 느낌은.. ‘나의 소녀시대+신과함께+오싹한 로맨스’ 같은 느낌이었다.
되게 재밌었고 풋풋하고 좋았다 ㅋㅋㅋㅋ 근데 좀 무서웠어서..
개인적으로 이 영화는.. 나이를 막론하고 누군가와 막 사귀기 시작한 커플이 보거나.. 좀 10대 후반, 20대 초중반의 젊은 연령대가 보면 괜찮을 영화일 듯 싶었다.
그 이후의 나이대가 이 영화를 보는것도.. 나름 옛날 추억을 회상하고.. 인생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만한 여지가 있어서 괜찮은거 같다.

영화 도중에 F4의 따오밍스를 연상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OST 들으면서 나도 좋았으니까..
이 영화에 대한 리뷰는.. 나중에 쓸 수 있으면 따로 쓰고 싶을 정도로 꽤 괜찮았다.
근데 영화가 좀 무섭다 ㅋㅋㅋㅋㅋ

2월 셋째주인 이번주에는.. 일단 시험을 끝난 지 막 얼마되지 않은 시점이라.. 저녁에 빨리 퇴근하면 집에서 띵가띵가 유튜브 보면서 노래나 따라 부르고.. 유튜브 좀만 하다 잤다.
아.. 역시.. 잠을 푹 자는건 너무 너무 행복하다.
아.. 그리고 화요일에는 타 팀 다른 동료와, 우리 팀 같은 동료 각 1명씩과 함께 점심으로 식당에 가서 돈까스를 먹었다.

창가자리에 앉아서 돈까스를 먹는데..
밖에서는 눈이 소복소복 나리고 있었다.
1년 전의 이맘 때쯤엔.. 한국사 시험 끝나고 토익스피킹 준비하며.. 이번에도 꼭 레벨7 따야한다고.. 집 안에서 절박하게 계속 공부하던 내가 있었는데..
단 1년만에, 눈 내리는 날, 좋아하는 동료들과 눈이 오는 풍경을 바라보며 맛있는 돈까스를 먹을 수 있음에 진심으로 감격스러웠고 행복했다.
그 날에는. ㅋㅋㅋㅋㅋㅋㅋ

다음 날 오후가 되니까, 그 식당의 우리 옆 테이블에서 확진자가 나와서 pcr 검사를 받으라는 연락을 받았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결국 인근 선별진료소에서 검사를 받았다.
밖에서 30분동안 추위에 떨다가 콧구멍이 쑤셔졌다. ㅋㅋㅋㅋㅋ
결과는 다음날 아침에 나왔는데.. 아침에 너무 늦게 나와서 양해를 구하고 늦은 출근을 했다.
결과는.. 음성이었으니까.. ㅋㅋ

그런데 출근하니까 또 분위기가 이상해서.. 왜 그러냐 했더니, 이번엔 우리 팀에서 진짜 확진자가 나왔다고 연락받았다고 해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졸지에 나는 또 이틀 연속으로 검사를 받았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갔더니 어제 나를 안내했던 거기 직원이.. 나보고 “어? 아까도 오지 않으셨어요??” 라고 묻길래..
“아이고.. 아까가 아니라 어제였슴당 ㅎㅎ”이라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ㅋㅋㅋㅋㅋㅋㅋ
그 날엔 반대편 콧구멍이 쑤셔졌다. ㅋㅋㅋㅋㅋㅋㅋ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렇게 쑤셔진 콧구멍즈들이 이틀이 지나도 계속 아팠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튼.. 물리적인 자극 때문에 양쪽 콧구멍이 아픈건 아픈거고..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도 또 결과는 음성 나와서 그 다음날에도 출근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엄마가 폐가 안좋은데.. 내가 이틀 연속 음성이 나와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양성이었으면 죄책감에 시달렸으리라.
그래도 엄마가 결과 나올 때까지 딸래미 셀프 자가격리 한다고.. 밥 차려주고 알아서 가져다 먹으라고 방 문을 두드렸다. 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반찬을 워낙 성대하게 차려줘서.. 너무 감격스러웠고 감사했다. ㅠㅠㅠㅠㅠㅠ
역시 우리엄마 짱짱



그래도 어쨌든 코로나 확진자와 관련해서 업무적으로 스케쥴을 다시 조절해야 하는 상황이 와서..
밤 늦게까지 야근했는데..
팀장님이 안쓰러웠는지 저녁에 간식도 사다주셨다.
행복하다… ㅋㅋㅋㅋㅋ
일부러 내 취향에 맞춰주신다고..
내가 편의점에 브이콘이 어딨는지 못찾고 있는데도.. 팀장님께서 일부러 편의점 알바생에 물어서 브이콘을 사다 주셨다. ㅋㅋㅋㅋㅋ
다른 과자보다 열량이 적은 브이콘을 아작아작 씹어먹고.. 같이 골라주신 신상 빼빼로랑 커피를 섭취하고 있는데.. 새삼 행복했다.



아.. 그리고 어제는 과장님께서 여러 농담도 해주시구..
1월달부터 새로 온.. 나보다 나이는 어린 여자 상사가.. 분위기 편해지게끔 이러저러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많이 해줘서 너무 좋았다..
그 분은 기분이 좋을 때 일기를 쓰는 편인데..
나중에 그 일기를 다시 보면 행복해진다고 했다.
나는.. 슬플 때 일기를 쓰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편이었는데..

그래서 지금은 이번 달의 행복한 내용을 일기로 써봤다.
나중의 내가 오늘의 일기를 보고.. ‘그래도 내 인생은 행복한 경험도 있구나.’라고 빙긋이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ㅋㅋㅋㅋ
그래서 오늘의 행복을, 글로 남겨서 저축하려 한다. ㅋㅋ

그럼 이만.. 안뇽.


+) 2월 업무 스케쥴을 다시 조정하느라..
모니터를 멍하게 보면서 2월 근무일수는 18일이라 이걸 맞춰야한다며.. 업무에 집중하면서 멍하니 18.. 18..
이라고 혼잣말 하는데..
갑자기 옆에 동료들이 파하하 하며 웃었다 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놀라서 황급하게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손사레를 쳤는데..
다 알고 있지만 그냥 감정없이 모니터보면서 시팔시팔 하는게 웃겼다고 ㅋㅋㅋㅋㅋㅋ

아.. 그리고 4시 44분이 되자, 또 옆의 동료가 자기만 볼 수 없다며 지금 시계를 보라 했다. ㅋㅋㅋㅋㅋ
전 회사의 우리 과장님이 생각났다.
우리 과장님도 나한테 이런 장난 종종 쳤었는데..
본인 막내 시절부터 본인의 선임한테서 받은 장난이었다고..
가끔은.. 옛 동료들이 그립다.
이제는 그 자리에 모두 없어서 돌아갈 수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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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일단 좋은 소식은, 엄마가 마침내 수술을 받았고, 패혈증 같은 부작용은 없다는 것이다.
안좋은 소식은, 수술 받은지 거의 3주가 다되어 가는데도 폐활량이 잘 늘지 않는다는 것이다.

12월 한달동안은.. 엄마가 수술 후에 실밥을 풀기까지, 주말에는 공부도 안하고 전전긍긍하면서 기다렸다.
엄마가 괜찮을까 싶어서..

엄마가 수술받는 주에는 평소에 안가던 성당도 자주 가고..
너무 불안해서 엄마의 수술을 일부러 잊으려고 노력했고..

12월 마지막 주에는.. 원래 월말에 업무가 몰리니까.. 몰리는 업무 하고..
업무적으로 트러블 생겨서 결국.. 이 회사도 입사한 지 반년만에 내 본성이 드러나게 됐다.
힘들고 지치면 차마 숨기지 못하고 다 티나는거..

아무리 남들에게 지인씨는 부정적이지 않다고 들으면 무얼 하나.. 결국은 똑같이 돌아갔다.
나는 역시 사람 상대하는게 제일 어려워..

벌써 2022년 1월이 시작됐다.
올해에는 옆에 쌤이 육아휴직 1년을 들어가고..
나는 또 아무것도 모르는 누군가와 같이 일하면서 또 3~6개월을 고생해야 한다.

팀장님은 술자리에서 그런 말을 했다.
지인씨가 들어온 자리가 그런 자리라서.. 자기가 임금을 더 주거나 승진을 시켜줄 수는 없지만.. 지인씨의 일의 그릇이 커질 수 있게 다양한 일을 줄 수는 있어.
우리 팀에서는 인정을 해줄게..
본인의 역량을 본인의 자리에 한정짓지 마.. 라고.

그건.. 어쩌면 인어공주가 되라는 말 아닐까..
‘열심히 하도록 해.. 열심히는 하는데.. 그냥 그림자 속에 있어. 무언가 해낸다고 해도 눈에 띌 순 없고, 물거품이 되도록 해..’ 라는..
승진을 못하고, 임금이 크게 오르지 않는데.. 그릇만 커진다면 어쩌면 본인만 괴로운게 아닐까.
가지지 못하는걸 원하는건.. 본인만 괴롭잖아. 그게 열정페이인거고..

엊그제는 같은 팀의 동갑인 상사가, 회사의 윗분들을 모시고 성공적으로 프리젠테이션을 끝내고 돌아와서, 많은 팀원들의 축하를 받았다.
나는 그놈의 사직 일자 때문에 다른 사람한테 시달릴동안, 누군가는 한걸음 더 인정 받고 있었다.
물론 그 사람도 그 일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지만..
무언가를 열심히 했을 때, 성과를 인정을 받냐 못받냐는 또 다른 문제잖아. ㅎ.

도대체 몇 해를 살아도 이런 짓을 반복해야 하는건지..
이젠 좀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다.

하.. 나도 시험 준비해야 하는데..
정규직이 아니라서 너무 서럽고 또 서럽다.
회사생활은 사실 일보다는 사람이 좋으면 더 잘 다닐 수 있다는건 알지만.. 사람이 좋아서 계속 머물다가.. 사람 물갈이되면서 6년다닌 곳에서 쫓겨나듯 나온 적이 있어서..
그리고 이제는 사람이 좋은 거인지도 잘 모르겠다.. ㅎ
반년 지나니까 슬슬 장단점이 보이고 있어서..

어차피 시험은 올해까지만 준비할거야..
더 이상 토익 900점 넘기려고 공부하는 것도 너무 힘들어..
사람들 사이에서 시달리고.. 월말이라 일 더하는 와중에 공부해야 하다니..
남들은 쉽게 따는 전산회계 1급도.. 지난 반년동안 NCS랑 내 전공도 아니었던 다른 전공시험 준비랑 병행하느라 제대로 하지도 못했고.. 결국 따지도 못했는데..


내 취미이자 꿈이었던.. 외국어 공부를 못한게 벌써 2년이 다 되어간다..
현실에 치이느라, 다른 자격증을 준비하느라, NCS도 준비하고.. 앞으로 또 다른 전공시험을 준비하려면..
이렇게 벅차고 힘든 인생을 언제까지 버텨야 할까..
버틴다고.. 달라지긴 할까..

아냐, 실패해도 의미는 있어. 그 자체로도..
외국어도.. 다시 하면 되지..

지금 내 버킷리스트는.. 35살 1월 첫째주에 나 혼자 근사한 호텔을 잡아서 호캉스를 하는 것이다.
34살까지 준비해보고.. 안되면.. 이제는 그만 해야지..
10년 넘게 결국 내가 원하던 큰 성과에 도달하지 못한 채로 계속 무언가를 하는거.. 이젠 너무 힘들고 지친다..

31살의 나도, 일도, 사랑도, 건강도, 가족의 건강도… 다 힘들었는데..
34살을 시작하는 지금의 나는.. 역시 일도 약올리듯 더 받기만 하고, 발목 인대는 3년이 지나도 이젠 더이상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고, 가족의 건강은 여전히 안좋고, 사랑은.. 뭐 말할것도 없고..
여전히 엉망진창이다.

그래서 34살까지 열심히 해보고, 더 이상 안되면.. 이제는 현실에 순응해서, 더이상 열심히 하지도 않고, 그냥 퍼져서 살아보려고..
나는 이제 너무 지쳤어..
내 기대를 충족시키려 하는 것도, 다른 사람의 기대를 충족시키려는 것도..


다음 생애에는 어딘가의 집시처럼, 감히 남의 인생도, 내 인생도 책임지려 하지 않고,
내가 내키는대로 술먹고 노래하고 춤추고, 여행다니면서 즐겁게 살다가 어느 날 죽어버리고 싶다.

어쨌든, 2022년 1년의 목표는.. 일도 잘 하면서, 올해를 마지막으로 젊은 시절에 했던 모든 공부를 끝내는 거..
좋은데 취직하려고 4년동안 아싸로 지내면서 그토록 아등바등했던 대학생때의 김지인이 너무 불쌍하고..
외국어 쓰려는 일을 하려고 10년동안 외국경험 하나 없어도, 영어, 일어 공부하면서.. 각종 매체 셰도잉하고.. 외국인 친구한테 한국어 가르치고.. 타지에서 외국어도 배워보고.. 외국 팟캐스트도 듣고..
그렇게 설레여했던 김지인이 너무 안쓰럽고..
이번엔 진짜 꿈을 쫓아보겠다고 몇년동안 다닌 직장 때려쳤던 김지인이 너무 대견해서..
그래서 이젠.. 올해까지만 하고 그만하려 한다..

실패를 해도 그것도 인생이니까 받아들일 수 있을거고..
성공을 하면 당연히 좋은거니까.. 새로운 곳에서 다시 새로운 시작을 하면 돼..


이러면.. 남들처럼 연애하고 결혼하는건 이제 포기해야겠지만..
설령 그런다 한들.. 이젠 상관 없어.
어차피 35살이 시작되면.. 이때까지 해온 것들 때문에 너무나 지쳐서.. 그런게 눈에 보일리가 없다..
스스로나 잘 다독이며 살아가야지..

올해엔 어떻게든 끝장을 보자.
그 끝이 설령 낭떠러지더라도, 나는 결말을 봐야 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
이건 내 인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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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합격선에서 약 1.5점 내외의 차이로 필기에서 떨어졌다.
사실 필기시험 결과에는 최종 합격자 컷트라인만 나오고 내가 실제로 몇 점을 받았는지는 나오진 않았지만..
나는 NCS 책 몇권 풀면서 가중산술평균에 굉장히 익숙해져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ㅎ
그런거는 계산해보면 대략적으로는 알 수 있다.
점수를 보아하니..
NCS는 2년 전보다는 6문제 정도 더 맞았다.
60개 문항 중에 40개 언저리는 맞았으니..
내가 이 때까지 NCS용 PSAT 문제집을 6권을 풀었는데..
1권 당 1.67점씩인가.. 싶어서 조금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그래도.. 작년에 NCS 공부 처음 시작했을 때는.. ‘내가 이걸 한다고 뭐가 달라질까’라고 생각했었는데..
PSAT 수준으로 나온 문항에도.. 어쨌든 예전보다 더 많이 맞는걸 보면서..
조금의 위안은 됐다..

상식,전공은 예상대로 진짜 딱 5개 틀렸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쩐지.. 모르겠는건 아예 모르겠더라니..
회사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고 안찾아보고가 이렇게나 차이가 크다고? 라며 혼자서 새삼 놀라워했다.. ㅋㅋ ㅠㅠㅠㅠ

논술은.. 생각보다는 점수가 잘 나오지 않았다..
근데.. 사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이번에는 시험 막판에 부랴부랴 준비한거 치고 잘나온거기도 했다. ㅋㅋㅋㅋㅋㅠㅠㅠㅠㅠㅠ
그래도 나름 농업에 관해서는 2년동안 비벼본 짬바가 있다고 생각했는디..
결국은 안되브렀구먼.. ㅎ ㅠㅠㅠㅠㅠㅠ


여튼 그래서 합격선에 1.5점 부족한 점수로 탈락했습니다.

왠지 불합격하면 또 우울할거 같아서.. 어제는 내가 갖고 있던 옷 중에 제일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회사를 갔다.
6시가 넘어서도 결과가 안나오길래.. 2년 전처럼 저녁 8시에 결과가 나오나.. 싶었는데..
6시 10분이 되어서야 결과가 나왔다.

뭐.. 그치만 사실 아무리 혼자 계산을 하고 쌩쇼를 해도 불합격인 사실은 변함이 없다. ㅎ
그치만 2년 전에는 NCS에서 떨어져서 모든 상식, 전공 시험 점수가 채점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폐기처분 됐었는데..
이번에는 결과가 나와줘서 감사했다.
무언가.. 조금은 더 납득할 수 있었다.
일단 올해는 이거면 됐다.
시험도 쳤고, 어쨌든 결과도 나왔으니..
갑자기 이 시험 준비한다고 그 전날로 예정되어 있던 가족여행 싹다 취소하고 본 시험이긴 하지만.. 암튼.. ㅋㅋㅋㅋ ㅠㅠㅠㅠㅠㅠㅠ



그 결과를 보고 어제는 회사에 남아서 잔업을 했다.
월말이라 마감해야 하는 업무가 있어서…
외부에서 업무를 끝낸 과장님이 저녁에 돌아왔다.
나한테 여러가지 조언을 해줬다.

그 중 하나는.. 자기 전에 오늘 있었던 일 중에 행복한 일을 하나 생각하고 자라는거..
매일 매일의 사소한 행복이 쌓이고 쌓여서, 본인의 자존감이 되는 거라고 했다.
자존감이 곧 행복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내가 지난 10년동안 몸으로 부딫히며 간신히 막연하게나마 느끼기 시작한걸.. 이렇게 명쾌한 말로 듣자니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심리상담사의 칭찬,감사 일기 이야기와 결이 비슷한 말씀을 하시길래.. 역시 기분이 이상했다.
그냥.. 조금은 많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나한테 그러셨다.
긍정적으로 살라고.

그래서 내가 웃으면서 ‘제가 혹시 부정적으로 보이셔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거냐 ㅎㅎ’라고 물었더니..
지인씨 부정적으로 안보인다고..
지인씨는 본인이 내성적이고 부정적이라고 말은 하지만..
옆에서 지인씨를 봤을 때 충분히 사람들과 친화력 있게 지내고 있고 부정적이지 않다고..
‘자네, 꽤 괜찮은 사람이야.’ 라고.

그치만 긍정적으로 살라고 말하는건..
지인씨가 오늘을 더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라고..
아무리 현실이 힘들 때가 오더라도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있으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문득문득 지인씨가 지난 회사생활에서 힘들었다는걸 얘기하길래 말해봤다고..
오늘 하루에 딱 1가지 감사한걸 생각하며 잠들면, 조금 더 기분이 나아질거고..
앞으로 3년, 5년 후의 내 미래를 그리면서.. 그 사이사이에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더라도.. 조금은 캐쥬얼하게 희망을 품고 살면 행복해질거라 해주셨다.
조금은 허황되어보이는 미래라 하더라도 말이다..
내가 그린 그 3년, 5년 후의 미래가 꼭 그 모습 그대로 실현되지는 않더라도..
결국 꿈을 마음 속에 그리면 어느 순간 닮아간다고..
그렇게 마음에 희망을 품고 사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그 얘기를 듣고.. ‘뭐지.. 프랭클린 다이어리에 있는 말이랑 비슷한데..’ 라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ㅋㅋ
역시.. 사회적으로 어느정도 성공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비슷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건가? 라는 생각도 잠깐 들었고..
덧붙여 과장님은, 사람은 사람인지라,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으로 생각하는게 더 쉽지만.. 그럼에도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노력을 계속하다 보면,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게 될거라는 말을 해주셨다.

기분이 좀 많이 이상했다.

똑같은 ‘긍정적으로 살아’라는 말에도,
누군가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방법을 제시해주는 사람이 있고.. 누군가는 힐난하듯 말하는 사람이 있다.
작년 상반기의 나는, 왜 너는 긍정적으로 살지 못하냐라며, 나를 힐난하기만 하는 사람들 한 가운데서 매일 힘들었었는데..

오정세 배우가 동백꽃 필 무렵에서 조연으로 출연해서 상을 받았을 때,
이런 말을 했다고 했다.
자신은 몇 백편의 작품을 하면서 매 순간을 열심히 작업했다고..
그 중에는 잘 안된 작품도 있었고.. 잘 된 작품도 있었다고..
그치만 그 작품 중에 자신이 열심히 하지 않은 건 없고, 본연의 모습으로 매 순간 열심히 했다고.
제가 동백꽃 필 무렵이란 작품으로 결국 상을 받았듯이, 시청자 여러분에도 여러분만의 동백꽃이 언젠간 필거라고..

나는 예전에도 김지인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김지인인데..
똑같은 김지인일 뿐인데 누군가에겐 배척당해도 누군가에겐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한다는게 조금은 이상했고, 사실 많이 감사했다.

나는 한 평생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더 갈고 닦아야 한다고만 생각했는데..
어쩌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이대로의 나도 충분히 괜찮은 자질을 갖고 있다고..
그 좋은 자질로 앞으로 희망을 품고 더 살아보자고..
다시 한 번 다짐을 했다.

그러니, 앞으로는 조금 남들한테 안좋은 소리를 듣더라도 그냥 흘려보내야지..
나는 좋은 자질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이상으로 오늘의 행복 한 조각이자 감사일기였습니당.


- 인생은 참 알다가도 모르는 것 투성이라 생각한다.
작년의 나는, 같은 회사에 탈락했을 때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언제까지고 기약 없는 이 짓을 반복해야.. 취직을 하고.. 남들처럼 가정을 꾸린다는 그 ‘보편적이지만 행복해진다는’ 기준에 가까워질 수는 있을지.. 많은 낙담을 했었다.

어제의 나는, 또 같은 회사에 탈락했지만, 그래도 결과가 눈에 보인다는 것에 감사했고.. 과장님의 조언에 더 감사했고..
뭐 사실 좋은 말씀해주셔도.. 그 한 켠에는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일 잘해라 노예야 ㅋㅋ’ 이런 맥락도 아예 없진 않을건데..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럼에도 부하 직원에 구체적인 방법을 어느 정도 제시해주고 ‘네 길을 찾아라’라고 해주는 상사는, 내 경험 상 의외로 사회에 별로 없다.
다들 던지고 알아서 해주기만 바라고 내 결과가 그들의 기대치에 못미치면 화내는 사람들이 많았지..

어쨌든.. ‘자네, 꽤 괜찮은 사람이야.’ 라는 말은 조금 오래 마음에 남을 것 같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참.. 인생은 아이러니하다. 단짠단짠이네.. ㅎ

Posted by 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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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주 일요일에는 내가 작년과 재작년에 그토록 가고 싶었던 회사의 필기시험을 보러 갔다.
이번에는 어떻게 서류에 붙게 되었다.
토익 900을 넘었던게 효과가 있었을까.. 아니면 한국사가 도움이 됐던걸까..
어쨌든 서류를 붙어서 필기시험을 보게 됐다는 데에 의의를 두었다.
시험 장소는 2년 전과 같은 학교.

2년 전에 비해서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는게 조금은 어색했다.
2년 전에는 많은 직원들이 나와서 시험 잘보라고 수험생에게 음료와 응원을 해줬었는데..
이번에는 여타 다른 회사들과 비슷하게, 문진표 제출하고 시험보러 올라갔다.

인성검사를 풀고, 2년만에 이 회사 NCS를 다시 접하게 되었다.
재작년에는 여기서 떨어져서 다른 문제를 보기도 전에 폐기처분 당했지.. 이번엔 잘하자..
라고 생각하고 페이지를 넘기면서..
‘아, 망했다.’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NCS책을 PSAT용으로 6권을 풀었어도.. 역시 답이 안나오는 문제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모르는 문제들이 많았다.
한 절반정도 풀고 있는데 5분 남았다고 해서.. 나머지는 그냥 다 찍었다.

다음은 상식,전공 문제였는데..
재작년에는 국립도서관에 있었던 그 회사의 1년치 사보를 보면서 준비하느라 비교적 쉬웠던거 같았는데..
올해는 미처 준비하질 못해서.. 문제지를 보는데 잘 모르겠는 문제들이 좀 나왔다.
한 5문제 정도였던거 같은데.. 5문제면 누군가는 붙고 누군가는 떨어질 정도겠지..
다른 수험생들도 다 풀고 엎드려 있는걸 봐서는.. 진짜 누가 더 아냐 모르냐의 싸움이 될 거 같았다.

마지막으로 논술문제를 보게 되었는데..
의외로 진짜 무역 문제가 나오는구나.. 싶어서 놀랐다.
기존에는 이런 문제가 안나왔던거 같은데.. 싶었는데 조금 의외였다.
올해는 KREI 보고서도 너무 급하게 보느라..
막판까지도 프린트 한거 보고 또 보느라..
문제를 본 순간, 농업관련 이슈로 쓸까.. 무역 관련 이슈로 쓸까.. 조금 고민했는데..
경제신문을 챙겨봤던게 올해 3월정도까지였어서..
그냥 막판까지도 봤던 KREI 보고서를 바탕으로 농업관련 이슈로 논술을 썼다.

그래도.. 지난 2년동안 이 회사 준비한다고 2,3달 정도 KREI 보고서들이랑 농민신문을 몇백 페이지 가량 봤던 짬이 있어서인지..
2년 전보다는 확실히 논술에서 쓸 말이 더 많았다.
재작년엔 내가 글을 쓰면서도 ‘이게 말이 되나?’ 싶어서 계속 글이 딱 떨어지지 않고 중언부언만 반복하고 시간이 부족했었는데..
이번엔 내가 글을 쓰면서도 ‘어쩌면 이게 말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도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시간 내에 했다, 라는 느낌이었다.


시험이 끝난 뒤에는 5시가 좀 안되어서..
오랜만에 간 김에 명동에 들러서 명동 성당에 갔다.

3,4년 전에 새벽 6시에 명동성당에 갔던 길은, 조금 많이 무섭고 쓸쓸했다면,
이번에 간 명동성당은, 사람도 북적북적하고 사진을 찍으려던 한국인 커플들도 많았고..
왠지 따스하고 반짝반짝한 느낌이었다.

이번에 미사를 참석하면서..
그래도 드문드문 유튜브로 매일미사 프로그램을 봤던게 도움이 됐구나.. 싶었던게..
예전에는 기도문을 따라할 때, 뭔가 남들이 하는 말을 잘 못알아 들어서.. 기도문 중에 알아듣는 말만 조금 따라하는 정도였는데..
이제는 그 때보다는 조금 더 따라할 수 있었다.
조금은 기뻤다.
미사를 참석한 이유는.. 뭐.. 이 회사에 붙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러 간거는 아니고..
내가 인생에서 힘들었던 시기에, 처음 명동성당을 갔던 어느 날,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평화를 빕니다’라고 인사했던 기억이 너무 좋았어서..

이번에도 어색하게 신도들 사이에서 ‘평화를 빕니다’라고 인사를 하는데..
조금은 더 감사했다.


간만에 주말에 공부를 하지 않고 어딘가를 돌아다닌다는게 너무 좋았다.
비록 몇 년만에 다시 간 명동은, 예전보다는 외국인 관광객이 없고..
한국인만 길거리에 드문드문 있고..
지나가면서 몇몇 식당과 카페들이 ‘일요일 저녁 8시인데 문을 닫았네.’라고 할 정도로 문을 닫기도 했고..
많은 길거리 음식들이 사라졌고..
대신에 오징어 게임의 인기로 인해서 달고나를 1개당 1,000원에 파는 노점이 좀 생겼지만.. (…서울물가 개비싸다..)
그래도.. 이런 명동을 보는 것도 지금 한 철이리라..
미래에는 또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외국인으로 북적이겠지.

예전에는 특정 장소에 가면 항상 볼 수 있는 풍경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 시기에, 그 장소가 아니면 볼 수 없는 풍경이 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공간이라도 ‘언제’ 가냐에 따라서 풍경이 많이 달라질 수 있다.
단순히 기술의 발달로 인해서 바뀐거든..
아니면 사회문화적인 이슈로 인해서 바뀐거든..
아니면 원치 않았던 코로나 같은 팬데믹 같은 이슈로 바뀐거든..

하지만 누군가한테는 생계이고, 실례될 수 있는 말일 수도 있으니..
여기서 그만 말을 줄일까 한다.


앞으로 12시간 내외로 이 때 본 시험의 결과가 나온다.
페이는 많이 적어도, 그래도 꼴에 직장이 있다고.. 굉장히 낙담하던 작년과는 다르게.. 올해에는 그냥.. 조금은 더 무덤덤한 느낌이다.
지금 다니는 회사가 마냥 천국은 아니고.. 괴로운 점도 분명 있지만..
그래도 같이 다니는 사람 자체는 조금 좋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어서 그런가..

그래도 제일 첫직장 때 으쌰으쌰했던 동료들이 제일 그립다.
이제는 그 팀도 없고.. 다들 뿔뿔이 흩어졌으니까 돌아갈 수는 없고..
내가 알던 그 회사는 이젠 이 세상에 없으니..
내가 그리워하는 건 실체가 없는 것 뿐인지라..
그리움은 그리움으로만 남겨두기로 했다.

살아남으려면 어떤 식으로든 계속 변해야 하니까..

내년 이맘 때쯤엔 나는 어디서 무얼 하게 될까..
또 앞으로 1년을 어떻게 지내야 할까..

하긴, 당장 12시간 내외의 미래도 모르는데..
어떻게 1년 뒤를 알 수 있겠어 ㅋㅋ
내가 지금 할 수 있는건.. 목표를 세우는 것과 행동하고 분석해서 개선해야 하는 것 밖에는 없다.
미래를 모르는 한낱 인간일 뿐인지라.. ㅎ

몰라.. 이래놓고 이따가 결과 또 탈락 나오면 격분해서 블로그에 글 쓸 수도 있지 ㅋㅋㅋㅋ
다음에 또 두고 봅시당.
일단은.. 또 이번주를 시작해야 하니까.. 여기서 이만 총총총

Posted by 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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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들어간 회사는.. 드디어 100일이 넘어갔다.
이번에도 혹시 짤리는게 아닌가 싶었지만.. 다행이도 짤리진 않았고.. 계속 하게 됐다.
하지만.. 처음에 칼퇴했던게 무색하리만큼.. 또다시 야근 야근 야근.. 나만 야근..

이제는 내가 야근을 버는 타입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는.. 야근을 해도 공식적으로 인정받지도 못하고.. 승진을 할 수도 없는 곳..
의미 없다는거 아는데도.. 일이 눈에 보이면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고.. 잔실수 없이 잘해서 남들에게 안좋은 소리 듣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너무 커서.. 스스로를 괴롭힌다.

그래도 아직 1인의 역할을 하는건지는 불분명해서..
일을 할 때 자꾸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건.. 팀원들이나 팀장급이 안좋으면.. 이번엔 길게 끌지 말고 다시 관두려고 했는데.. 그러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내 상사는 나보고 잘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잘 다독여주라고 했다. 잔실수 조금 해도 괜찮다고..
물론 원래부터 사무직이었던 내 입장에서는, ‘저건 잔실수가 아닌데요.. 돈 관련된건 욕먹기 딱 좋은데요..’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래도 꿀꺽 삼켰다.
되게 모처럼만에 듣는 감사한 칭찬이었으니까..

작년 초에 이직했을 때, 쥐뿔 아무것도 모르는데 나 혼자 다 책임져야하고.. 맨날 야근하고 주말출근하고..
한번에 왕창 일 알려주는 바람에 일부 업무 프로세스를 누락시켜서 인수인계 해주고나서는..
그마저도 현재 문제가 해소되지 않은 일들을 잔뜩 넘겨준 바람에 매일같이 울면서 허우적거리는 나한테..
회사 전체가 한마음 한뜻으로 ‘쟤 스펙 좋아서 뽑아 놨더니 상태 왜 저래?’라고 면전에다 대놓고 말하는걸 경험해서 그런가..

일을 잘하고 있다는 말이 도저히 적응이 안된다.
그치만 진심으로 감사했다. 살다보니 이런 일도 또 있구나..

근데.. 그래도 힘들긴 힘들다..
결국 첫 연차를 입사한지 100일만에 이번주에 써버렸다.
공원에서 경치 보면서 멍때리고 있는데.. 진심으로 너무 행복했다.
그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서도 결국 사람에 시달리는 일을 하는거니까..
차이가 있다면… 예전에는 얼굴도 모르는 불특정 다수를 상대하는거고.. 이제는 얼굴도 이름도 다 아는 특정인원을 상대해야 하는데..
혹시라도 심기를 거스르진 않을까 항상 살얼음판을 딛는 느낌이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느낌이라 외로웠다.
이제 더는.. 나에게 있어서 예전의 서로에게 으쌰으쌰하는 회사와 팀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왜 뿔뿔이 흩어진 예전 우리팀 동료들이.. 막상 이직하니까 이질감에 힘들어하는지.. 요즘 온 몸으로 부딫혀가며 절실히 깨닫는 중이다.
너무 외롭다..

여러가지 긍정적인 마음과 부정적인 마음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는 요즘이다..
그나마 다행인건.. 이제는 조금의 감사함이라도 겪을 수 있다는거. 그게 다 어디냐..
나는.. 작은 감사함같은 것조차 무척 그리웠나보다.

Posted by 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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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버스로 편도 1시간 반을 이동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
서울에 잠깐 있었을 때, 경기권의 애들이 서울까지 오느라 1시간, 1시간 반 버스를 타고 다니는걸 보고..
어떻게 저렇게 아침일찍 일어나서 이 시간에 맞춰 오는걸까 의아해했는데..
그 비슷한걸 하게 됐다.

요즘은 새벽 4시 전후로 일어난다.
아침에 일어나서 1시간 회계공부를 하고, 5시반부터 부지런히 씻고 화장하고 옷을 입으면 7시가 된다.
그러면 부랴부랴 출근해서 8시 반까지 회사에 도착한다.

지난 한달 반동안은 평온한 일상을 보냈다.
대신 월급도 지난 회사에 비해 반토막이 났다.
이번에 느낀 것은.. 사람에게 워라밸이란 너무나 중요한 요소라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이가 적다는 것은.. 내가 무언가를 원할 때 사지 못한다는 것임을 뜻하는걸 배웠다.

지난 한달 반동안 야근다운 야근을 한게 손에 꼽았는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화장을 하고 출근을 하는게 이상하리만큼 힘들지 않았다.
회사에서도 항상 웃으면서 사람들을 대할 수 있었다.
가끔 내가 못하는 일 때문에 좌절을 하기는 했지만…

33살에 어쩌다보니 다시 막내로 돌아가는 생활이 되기는 했지만,
게다가 이제는 여기에 계속 있다면 잡일만 하다가 내 일생이 끝나긴 하겠지만..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방글방글 웃으면서 화장까지 매일 해가면서 회사를 다닐 수 있는 사람이었나..
새삼 놀라웠다.

6년 다닌 회사를 뒤로하고 나올 때, 새로 바뀐 팀장으로부터 ‘너 어디가서 그렇게 화내면서 회사생활하지 마라’라며 면전에다 대놓고 욕먹다가 얼마 안가서 퇴사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이직하고 3개월을 또 다닐 때, 매일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눈물로 잠들었던 적이 있어서 그런가..
기분이 이상했다..
한달 반동안 화가 이렇게 많이 안날 수 있다니..
오히려 방글방글 웃을 수 있다니.. 왜지..
아직 메인롤이 없어서인가..
하지만 단순히 그렇다기엔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은 되게 바빠보이는데도 큰소리를 안내면서도 사근사근하게 의사소통을 하는걸 보고 너무 신기했다..

참.. 내가 오래 산건 아니지만 별 일이 다 있네.. 싶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안다..
회사가 직장인에게 있어서 유토피아가 될 수는 없다.
분명 시간이 지날수록 본성이 드러나고야 말 것이다.
원래 초반 3개월은 허니문 기간이라고 해서.. 신입과 회사가 서로 탐색하는 기간이니까..


하지만 반면에 너무나도 작아진 월급을 보고 착찹한 마음도 들었다.
3년 전부터 너무나도 사고 싶었던 가방이 하나 있었다.
그 당시에는 퇴사 후, 얼마 안되던 시절이라, 마음이 조급했고, 어차피 사람을 만나는 것도 아닌데 당연히 미래에 대한 투자를 하는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오늘, 우연히 가방 가격을 찾아보다가.. 내 월급을 비교해보고 조용히 인터넷 창을 닫았다.
40만원조차 안되는 가격이었는데도.. 부담이 되어서 차마 결제를 할 수가 없었다.
참.. 한편으로는 착찹했다.. ㅎ


일에 대해서는..
예전의 일과 비슷한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다.
그런데 한가지 놀라운건.. 더이상 외국어를 쓸 기회는 아예 없다는거..
지난 한달 반동안 외국어를 쓸 일이 단 한번도 없었고, 이 자리는 원래 그런 자리라서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납득했고, 요즘 같은 세상에 감지덕지하며 다니고는 있지만..
어느날 우연히 회사 근처 무인 편의점에서, 내가 모르는 회사 정직원과 외국인이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걸 옆에서 보고 있자니, 갑자기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아무래도 아직은 포기가 안되나보다..
하긴.. 내 20대부터 30대 초까지 거의 10년동안 외국어는 내 취미생활이었는데.. 하루 아침에 포기가 되면 그게 이상한거겠지.. ㅎ

그나마 다행인건.. 칼퇴가 가능하니까 6시에 퇴근하면 근처 카페가서 밤 9시까지 공부하는게 하나의 낙이 되었다.
요즘은 어처구니없게도 전산회계 1급을 공부하는 중인데..
계기는 한국조폐공사 지원할 때, 가산점에 전산회계,세무가 들어가 있는걸 보고 충격 받기도 했고..
입사 첫 날에 우리 팀의 대빵으로부터 ‘자네 회계는 좀 할줄 아는가?’라는 질문을 받아서이기도 했다.
공부를 하는건 어떻게보면 진절머리가 나긴 하지만..
너무 친구없이 혼자였던 시간도 길었고..
회사에서 방글방글 웃으면서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고 나면.. 나 혼자 고요하게 지낼 시간이 절실히 필요한데..
아이러니하게도 공부가 위로가 되어준다.
적어도 책은.. 사람 뒷통수는 안때린다.
내용이 이해가 안되어서 내가 빡칠수는 있어도.. 내가 책의 비위를 맞춰주느라 신경쓸 필요도 없고..
책 앞에서는 굳이 내가 타인에게 긍정적인 척 안해도 되는 것도 좋고..
책은 언제라도 펴면 어색한 기류 하나 없이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기만 하면 된다는게 좋다.
그래서 요즘엔 그냥 내 본연의 모습으로, 책 내용이 이해가 안되면 빡쳤다가.. 이해가 되면 좋아하고.. 그러고 있다.
하.. 공부를 10년 넘게 하니까 이젠 이런 변태같은 지경에 이르렀네.. ㅎ
인생.. 참 모를 일이다.
나는 원래 공부하는게 싫었는데.. 근데 사회생활이 더 싫엉….. ㅠ

부모님은 가게를 내놓으셨지만 요즘같은 킹시국에 가게가 언제 넘어갈지는 요원한 상태이다.
그래서 주말 중 하루는 가서 작게나마 도와드리고 있다.
대체적으로는 회사 다니면서 일어나는 재미난 일들을 말씀드리고는 있지만..
가끔 부모님의 잔소리가 한소리씩 얹어진다.

아빠는 말했다. ‘너 이제와서 회계 자격증 따봤자 소용이 없어. 네 나이 또래는 이미 과장급인데 니가 어쩌려고 그래.’
엄마는 말했다. ‘너 도대체 이러다 일평생 공부만 하다 끝날거 같다. 언제 젊음을 즐기려고 그래.’

아.. 또 마음이 아프네.. ㅎ
20살때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학창시절에 내성적이어서 받았던 상처는 생각도 안하시고.. 학교 공부만해서 소용이 없다.. 좀 동기들이랑 어울려라..
공무원 준비를 해라.. 휴학은 절대 안된다.. 취직이 안되면 대학원에 적을 두고 공무원 준비를 해라..
6년다닌 회사를 뒤로할때도.. 이제와서 나가서 뭐해먹고 살려고 그러냐..
무역 자격증 공부를 할때도.. 이제와서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냐..
공부만 해서는 부자 못된다. 부자 되는 공부를 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빠 말이 맞았을 수도 있다.
딴 자격증들 다 소용 없었으니까.
근데 후회는 덜할 수 있었다.
내가 선택했고, 도전했고, 공부로 성취해봤는데 결국 직업으로 갖는건 실패했으니까..
가봤으니까.. 그걸로 됐다.
그래서 이번 말도.. 뭐.. 나 걱정해서 그런 말씀 하시는건 알겠는데.. 그냥 흘러 넘기기로 했다.
상처 받는건 의미가 없다. 상대방이 상처받으라는 의도로 한 말도 아닌데.. 나 혼자 상처받으면 나만 손해다.

나한테는 어차피 이젠 뭐가 별로 없다.
오랜시간 투자했던 공부도.. 결국 성공적으로 끝난건 아니라서 이젠 예전에 친했던 다른 사람들을 다시 만나기도 쪽팔리고..
페이가 많아서 내가 원하는걸 척척 사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도 아니고..
지금 하는 일은 내 꿈과는 거리가 멀어서.. 그냥 감사하게만 다닐 뿐.. 이제는 일을 내 몸 갈아가며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기엔 너무 이때까지 실망을 많이 했고 지쳤다.
남친이 있어서 내가 어느날 갑자기 새 가정을 꾸려서 애를 놓을 것도 아니고..
그냥.. 인생은 혼자인거지..

그래서 나는 아직 꿈을 계속 꾸기로 했다.
어쩔 수 없이 올 9월까지는 회계 공부를 해야겠지만…. (아직 53강 중에 18강까지 밖에 못봤다 ㅠ)
다시 NCS 준비하고.. 1년치 연구소 보고서들 조사해야지..
그래서 내년에는 또 다른 도시에서 일하고야 말 것이다.

실패할 확률은 높다. 또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해야 한다.
근데 내년까진 그래보려고…
아직 토익점수가 살아있다.

20대 때 내 꿈을 위해서 끝까지 달리지 않은 대가가 이거니까..
나는 성공이든 실패든 끝까지 해보고 결판을 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번에 이걸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유야무야 시간을 허투루 쓴다면..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후회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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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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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퇴사하면 퇴사 메일을 보내는 부류의 인간이라, 6년 다닌 회사의 퇴사 이후의 삶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근데.. 지난 며칠동안 멋들어지게 쓰고 싶었던 말은 머릿 속에 참 많았는데.. 막상 쓰려니 아무런 생각도 나질 않긴 하지만..

백수가 되기 직전부터 도서관을 다니며 인강을 듣고 무역영어를 취득하기 시작해서, 국제무역사, 원산지관리사를 땄다.
‘공’자로 들어가는 데는 아무래도 취직하기 어렵겠지.. 그리고 나는 외국어도 좋아했으니까 그 관련일을 하면 행복하지 않을까.. 싶어서 딴 자격증들이었다.
그 이후에는 3개월동안 서울 가서 에듀콘에서 영어를 배웠다. 9 to 5로 영어를 내내 쓴다는건 너무 좋았다.
그 전에 K모 대학의 어학센터와 C대학의 언어교육원, 대전의 영어카페였던 Talkholic을 거치고..
미국인 친구한테 한국어를 가르치며 틈틈이 배운 영어 실력을 내내 써먹는다는게 좋았다..
그 영어 하나 배우기 위해서 일하면서 틈틈이 봤던 영어 원서가 몇권이고, 프렌즈 시즌 1부터 10까지 반복해서 봤던게 몇 년이던가..
뭔가 배운걸 본격적으로 써먹는다는건 힘들지만 재밌었다. 기존에 대학에서 공부만 하느라 못했던 각종 술자리도 재밌었고.. 대학생활을 이렇게 했으면 더 행복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던 곳이었다.

그 다음에는 한 공기업 시험을 봤는데 NCS 점수를 컷트라인에서 3점을 남겨놓고 떨어졌다는걸 뒤늦게 알게됐다.
결국 연구소의 1년치 보고서와 계약 관련 법률 등을 조사하고 외우고 시험을 풀고 논술을 작성했으나,
그걸 평가 당하기도 전에 NCS 컷트라인을 못넘어서 모든 답안이 폐기처분 됐다.

동시에 한 일본계 기업에서도 최종면접의 문턱을 넘질 못했다.
그 때 한국인 사장과 일본인 사장 둘이 들어왔는데, 한국인 사장이 나에게 비웃듯이 일본어는 할줄 아냐고 물었다.
일본어를 안쓴지 1년이 다되어가는 시점이었건만, 그래도 배운건 머릿속에 남아있었는지 하고싶은 말은 할 수 있었다.
대신에 다른 한국어로 된 질문을 답할 때 표정이 일그러진 것으로 봐서 그게 떨어진 원인이었던 듯 했다.

이력서를 썼고 면접을 부르면 갔다.
백수가 된 지 거의 1년이 다 되어가던 어느 날, 도서관에서 집으로 가던 도중에 작은 교통사고가 났다.
차에서 내린 운전자는 나보다 3살이나 어린, 한 여자 공무원이었다. 사고가 나서, 자신의 남편에게 어쩔줄 몰라하며 전화를 했다.
나는 허리가 너무 아파서 낑낑댔지만, 정말 어처구니 없게도 그녀를 본 순간, 그 사람이 부러웠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도 결국 회사를 나올 수밖에 없었는데, 그 사람은 나보다 어린데도 안정적인 직장도 있고, 가정도 있었다는게 부러웠다.

여튼 그건 그거고 나는 교통사고를 당한 입장이니까 병원에 치료받으러 입원했는데 면접일이 잡혔고, 취직이 됐으니까 치료도 덜 받고 그냥 출근하러 갔다.
가니까 기존에 해보지 못했던 일, 시스템에 적응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리고 어려웠다.
준비했던 자격증과는 거의 겹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걸 생각할 겨를도 없이, 관리해야 할 품목들이 수백가지가 넘어가고, 일상적으로 사용해야 할 시스템은 오류가 참 많고..
업무에 익숙해져야 하고 그 사이에 업무 매뉴얼을 만들어야 하고..

내가 일을 빨리 배우지 못한다는걸 처절하게 느끼는 시간들이었다.
인수인계를 받았을 때, ‘왜’ 해야하는지 모르면 내가 그 업무 과정 자체를 외우지 못한다는 것도 뼈저리게 알던 시간들이었다.
업무를 익히면서도, 선임자가 준 인수인계 파일을 붙들고 업무매뉴얼을 내 식대로, 이해할 수 있게 최대한 덧붙이는 작업을 계속했다.
교통사고 때문에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매일 울면서 자정까지 남아있기가 일쑤였다.
전임자가 남긴 일들을 하는게 버거웠다. 그리고 5개가 넘는 프로그램의 수십가지가 되는 기능들을 그래도 원만하게 사용하려면 제품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어야 하는데..
제품 교육 자체를 받을 시간도 없이 업무에 내던져진것도 이유라면 이유일테지..
한편으론 억울하기도 했다. 난 퇴사할 때 매일 자정~새벽4시까지 남아서 내가 처리할 거 거의 처리하고 나갔는데.. 매뉴얼도 진짜 자세히 만들어주고 나갔는데.. 후임자가 계속 물어봐도 이해될때까지 알려줬는데..
하지만 그건 의미가 없는거다. 왜냐면 이 전임자도 나름 신경 많이 써줘가며 알려준거였으니까. 그렇게 계속 웃으면서 답답한 후임 알려주는게 어디 쉬운 일이었겠나. 그 사람도 힘들었을 터였다.

결국 나는 또 내 특기를 살려서 수백 페이지의 아름다운 업무매뉴얼을 남겨놓고, 많은 임원진들의 칭찬도 받았건만, 코로나 때문에 본사에서 TO 줄여야 하니까 나가달라 그래서 짐쌌다.
짤라서 미안하다는데 어떡하겠나. 미안한건 미안한거고 결과는 결과다. 나는 을도 아니고 병정무조차 안되는 인간이니까 별 수 없지.

그렇게 정신없는 시간들을 보내고, 그 다음은 2주동안 폐인처럼 지내다가, 어차피 하고싶었던 일도 못하고 어딜 가든 몸을 갈아 넣어야 하는거라면, 이제는 원래부터 그토록 가고 싶었던 공기업을 준비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토익도 다시 갱신하고, 경제공부를 처음 시작했고, NCS는 수리를 조져보겠다는 생각으로 PSAT 기본서들을 독파하기 시작했다.

괴로웠다.
경제학자들이 아름답게 경제가 어떻게 잘 풀릴지 딱 잘 토론해서 결론만 나왔으면 좋았으련만, 신고전학파냐, 신케인즈학파냐에 따라서 또 주장하는게 달랐다.
또 미시경제의 재난보조금과 공익형 직불제, 최저임금인상이 어떻게 경제에 영향을 주는지 배우는 것도 벅찼다.
하지만 그러고나서야 처음으로 시중의 경제신문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게됐다. 같은 경제현상을 두고,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누군가는 나라가 망한다며 난리를 칠수도 있고, 누군가는 나라를 위하는거라며 칭찬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후반부로 공부할수록 재밌긴 했는데, 근데 대체적으로 이해가 안가서 110강 짜리 강의 보는데 울면서 봤다.
한 강의를 3번씩은 듣고, 내 나름대로 정리하려고 필기를 미친듯이 했다.
하지만 지금도 한 50%정도만 이해 되는거 같다.. 경제학은 정말.. 문과의 브레인이 하는 학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경제도 못하고 영어도 못하는가.. 내가 가지지 못한 재능을 한탄하며 괴로워했다.

그리고 SRT를 타고 가고 싶었던 곳 중 한 곳의 시험을 보고,
또 PSAT용 NCS 책을 조지고, 또다시 1년치 신문을 조지고, 연구보고서를 조지려고 하던 중, 이번엔 서류에서 탈락한걸 알게된다.
왜지, 왤까, 토익이 900을 안넘어서일까? 아니면 남들은 다 있는 한능검이 없어서일까?
서류에서 탈락하고 나서야 그냥 스쳐지나갔던 ‘한능검, 우대 5%’라는 글씨가 엄청 커져서 내 눈을 사로잡았다.

그 다음은 12월 마지막주에 토익을 시험을 치러 5주동안 절박한 마음으로 시중의 ETS 1000제를 다 풀고 오답정리를 하고, 하고, 또 했다.
LC는 485인데 RC가 400 초반이라 900을 못넘겼으니까.
인터넷의 해커스 모의고사 RC 6개월치를 다 풀고, 오답정리를 하고, ybm 인스타 구독하면서 올라와 있는 팟 5,6 문제를 다 쓸어담고 풀고 또 풀었다.
이번에 못넘기면 공기업 준비는 다 관둬야지, 라고 절박한 심정으로 했다.
8년 전에 960점을 넘겼을 때, RC에서 문법으론 거의 모르는게 없을 정도였다는걸 생각하며, 이정도면 괜찮겠다 안주하지 않고 그냥 계속 했다.

결국 900점을 넘기고, 2월 초의 한능검을 준비했다.
1급이 필요했는데 올해부터 7급 공무원에서도 한국사 대신 한능검으로 대체되어서 서버 폭파되고 접수조차 힘들었다.
근데 어떡함, 나도 점수가 필요한데.
인강을 또 40강을 듣고, 모르는 내용을 채워넣기에 바빴다.
역시 절박했다. 나는 그 ‘한능검, 우대 5%’가 없는 인간이었고, 그거 때문이었는지 무엇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서류에서 떨어졌으니까..
70점 안팎으로 나오는 점수를 보며, 계속 반복해서 오답을 정리했고.. 어처구니없지만 참 다행스럽게도 100점으로 1급을 획득했다.

한능검을 공부하면서 한편으론 NCS의 비타민, 맥NCS를 하면서 계산 시간을 줄이는 연습을 했다.
아무리 NCS를 풀어도, 계산방법을 알아도 시험만 보면 속도가 안나서..
도대체 어떻게 사람들은 한 문제를 1분 30초만에 주파한다는건가.. 너무 괴로웠다.

그리고 토익스피킹 시험도 만료가 가까워져서.. 에듀콘에서 특강으로 들었던 토익스피킹 책을 다시 주섬주섬 꺼내서 3주동안 다시 리뷰를 했다..
당연히 이번에도 토익스피킹 Lv.7이 나왔다.
문법이 좀 틀려서 8은 안나오지만.. 어쩌겠나.. 해외 경험도 없고, 내가 평생 영어만 공부한 사람도 아닌 것을. 일하면서 틈틈히 영어회화 공부했던 게 다일 뿐인데..

그 다음엔 다시 NCS를 하면서 거시경제 리뷰를 다시 하던 중이었는데,
엄마의 병세가 더 악화됐다는걸 알게됐다.
종합병원에서 이제는 수술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엄마를 대신해서 가게를 맡아서 하기로 했다.
열심히 요리를 배우고 혼나가며 일을 했다.
하지만 역시 초짜가 몇십년의 일의 속도와 맛을 따라잡을 순 없었다. 여전히 엄마는 가게에 나와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험삼아서 봤던 모 기업의 NCS 성적이 상위 10%라는 연락을 받았다.
면접을 보러 가도 되는지, 그 결과가 나오기까지 1달이 걸렸다.
일하면서 그 날만을 기다렸다.
탈락이었다.
부모님의 상심이 컸다.

부모님을 빨리 일을 관두게 하고 싶었다.
그나마 NCS를 주로 보거나, NCS조차 보지 않는 곳으로 계속 서류를 넣었다.

그리고 내일, 출근을 한다.
그치만 결국 ‘공’으로 시작하는 곳은 아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경력으로 인정되는 곳도 아니다.
기존 업무와의 업무 연관성도 없고, 자격증은 쓸모가 없고, 페이가 쎈 것도 아니다. 또 물경력이겠지.

그치만 사실은 무섭다.
일에대한 경험이 마냥 좋았던건 아니어서..
맨날 울면서 야근하고.. 아니면 사람때문에 괴로웠고..
그래도 웃자.
원래 인생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거야.
오늘 내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내가 쓰는 내 역사는 달라지는거야.


지난 2년 반, 다사다난했다.
쉬웠던 순간은 별로 없었다.
회사는 전쟁터고 나가면 지옥이라더니, 매 순간이 어려웠다.

근데 시간을 돌려서 다시 그 회사에 계속 있을거냐고 물어보면, 그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세상엔 어쩔 수 없는 것도 있는거다.
그리고 경영학에선 그걸 SWOT 매트릭스의 Threat 으로 구별짓는다.
피할 수 없는 위협요소인데.. 그걸 한 개인이 어찌하겠나.
그냥 회색 코뿔소의 위기처럼.. 위험요소가 보여도 ‘괜찮겠지.’하다가 이렇게까지 되어버린 것을..

그렇다고 공기업을 도전한 것도, 성공은 못했다.
절박하지 않은 순간엔 임계치를 넘지 못했고, 절박해진 다음에야 임계치를 넘어서 무언가 성취했지만,
내 역량이 부족해서인지 11개월은 참으로 짧은 시간이었고, 11개월동안 새로운걸 거의 제로베이스에서 계속 성취하는 수준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도전한다는 게 참으로 벅찼다.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쳐서 바위가 깨졌나.. 싶으면 또 다른 바위를 깨러 무수히 많은 계란을 던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여러개의 바위들을 깼지… 그렇게 던진 계란이 수백 수천개였고…
저녁 5,6시부터 다음날 새벽 5시까지 공부해도 순공시간이 8시간 안팎밖에 안되는 스스로를 보고.. 떠오르는 태양 아래에서 난 왜 이것밖에 못하는걸까.. 좌절하던 내가 있었다.
원하던 점수가 원하던 기간 내에 안나와서 괴로워하던 내가 있었고..
그리고 나는 무직이 된 채로 1년이 넘어가면 미래가 불안해지고, 초조해지는 스타일이란걸 알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 스스로한테는 위로해주고 칭찬해주고 싶다.
뭐.. 비록 2년 반동안 계속 무언가를 하느라 인간관계는 다 끊겼지만……… ㅎ
결국 원하던 성취는 이뤄내진 못했지만, 나는 내가 해온걸 알잖아.

노력은 배신을 한다.
살다보니 배신을 하더라고.
노력이란 공든 탑은 무너지기 일쑤였다.
그래서 요즘은 커리어가 단절되지 않고 한 커리어로 쭉 열심히 해서 성취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다.

근데 처음 배신 당해야 ‘노력, 니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라며 분개를 하지..
이젠 하도 겪어서 면역이 된다. ㅎ
그치만 한편으론 안다.
이렇게 갈 데까지 가서 후회가 거의 없어지면, 과거에 대한 후회는 덜할 수 있다.
아니면 내가 포기하지 않으면, 언제든 다시 시작할 여지는 있다.

경험 상 무언가를 배운게 시험 끝났다고 몽땅 날라가는건 아니더라.
물론 대부분은 날라가지만 ㅎ.
하지만 나는 절박하게 노력했고, 자격증들 하나하나, 전공공부 하나하나가 나한테는 특별한 의미였으니, 내 안에서 또 다른 추억이 됐다.
그러니, 너무 주눅들지 말길. 좀 더 자신감을 갖길..

남들은 사회생활이 힘들면 취미로 수학의 정석 펼쳐놓고 미분적분 푼다는데..
나는 그렇게까진 못해도 나중에 취미생활로 PSAT 언어 부문 문제는 펼쳐놓고 풀어도 될거 같다.
오랜만에 그거 푸니까 재밌더라고 ㅋㅋ 딱히 공부를 별로 안해도 문제를 많이 맞기도 하고 ㅋㅋ
근데 수리는…. 예.. 전보다는 많이 맞기는 하는데요… 아직도 문제 푸는 시간은 한 문제당 2분 30초를 넘깁니다요.. 예….
이렇게 NCS 공부는 나한테 변태같은 새로운 취미를 하나 만들어줬다.

여튼 내일부터 또 다른 노력을 하러 간다.
내가 이번엔 잘 버틸 수 있기를..
기왕이면 웃으면서 일할 수 있기를.. 이젠 그냥 이것만 바랄 뿐이다.
그냥.. 오늘은 간만에 모든 공부를 다 집어치우고 지난 2년 반의 소회를 적어봤다.
그럼 안녕.

Posted by 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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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한치 앞을 알 수도 없는 까만 밤과 같다.

어제는 모처럼만에 10년 만에 다시 만난 옛 영어 선생님과 회포를 풀었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밤에 술 기운에 멀뚱히 베란다 너머를 보며, 불과 반년 전에 반년이나 준비한 회사의 서류 탈락 소식을 듣고 죽어버릴까라고 생각했던 내 자신이 생각나서 감회가 새로웠다.

오늘은 엄마가 병원에 갔다왔다.
엄마의 병세가 더 심해졌다고 했다.
아무래도 수술은 이제 불가피한 선택인 것처럼 보인다.

엄마를 대전역에 태워주고, 신탄진역에서 픽업하며, 일부러 병원에서 무슨 말을 들었는 지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그냥.. 무슨 말을 들을 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말의 무게를 내가 감당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결국, 아빠의 물음에 찬찬히 답하는 엄마를 보고 있자니, 결국은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작용과 수술 후유증은 엄마를 걱정하게 만드는 지긋지긋한 녀석들이다.
그 1년 동안 엄마는 더 약해졌다.
지난 2년 간, 좋은 명소를 갈 때마다 엄마를 낫게 해달라고 얼마나 많이 빌었던가.
그런 건 아무런 효력이 없었던 것 같다. 잠시나마 이기적인 내 위안이었을 뿐이다. 내 위안.
그리고 그런 행동 자체도 엄마한테 알게 모르게 또 부담을 지웠겠지.
나는 어쨌든 불속성 효자다. 불효자란 얘기다.

엄마는 후유증을 갖고 살지도 모르는 앞 날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기적인 딸년은, 진짜 지밖에 모르기에, 엄마에게 수술을 종용하고 말았다.
1년 뒤에 더 심해지면 어쩔거냐고. 후유증은 생길수도 있지만 안생길 수도 있지 않냐고.. 또 1년 뒤에 더 심해지면, 수술도 못하고 엄마에게 더 손을 못쓰게 되면 그 때는 우리가 후회하지 않겠냐고.
이건 다 지가 안아프니까, 엄마가 아프니까 지랄하는거다. 지 인생 아니라고 막말하는거지.

이제는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잘 사는건지, 잘 모르겠다.
예전에는 후회를 덜하는 선택을 하는게 맞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인간은 경영학이나 고전 경제학에서 가정하는 것처럼 모든 정보를 다 아는 합리적인 생명체가 아닌지라, 항상 미래를 모른 채로 그냥 저냥 더듬거리며 가로등도 없는 깊은 밤을 걷기만 할 뿐이다.
후회를 덜한다 생각해도 뒤돌아보면 후회 투성이인게 인생. 당장 내일, 몇시간 뒤조차 모르는게 인생.

10대, 20대 때에는 단순히 사랑, 회사가 힘들다고 징징대는 거였다면..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소중히 여겼던 것들이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요즘은 젊은 날에 성공한 연예인들이 부럽다.
그들의 미모, 명예, 인기.. 당연히 안부럽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그런걸 다 떠나서 그들이 부러운 이유는.. 적어도 그들은 가족들을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적어도 부모님 몸에 좋다는거 하나는 더 챙겨드리고, 몸에 안좋은 환경은 바꿀 수 있는 재력이 있다는거..
그냥 나는 그런게 후회스럽다.

어렸을 적, 집에서 엄마와 돈까스를 만들면서 그런 말을 했다.
나중에 어른 되면 엄마한테 맛있는 돈까스 많이 많이 사줄거라고.
근데 현실은.. 모든 게 요원하기만 하다.
열심히 살았다 생각했는데 남는게 없다.

엄마는 나같은 딸을 낳고 길러서 과연 행복했을까?

비가오면 개울가에서 울부짖는 청개구리는 되지 말자 다짐한 게 25년도 더 된 옛날이건만, 나는 청개구리였다.

Posted by 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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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NCS를 보러다녔다.
옛날처럼 한 곳만 죽어라 팔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보니.. 무작정 이력서를 쓰고 가서 기회가 되는대로 NCS를 보고있다.
근데 NCS만 보는데만 넣는건 아니고.. 걍 전공도 있으면 넣고..

한 곳에서는 NCS가 상위 10%였는데도 면접도 못보고 떨어졌다.
수리영역 하나 빠졌다고 내가 그런 점수를 받는 것도 놀라웠지만, 한편으론 상위 10퍼인데도 면접을 못본다는 사실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느곳에서는 NCS 과목에 정보능력이라 해서 갔더니 코딩을 물어본다.
도대체 왜 경영학 전공자들한테 이런걸 NCS로 묻지? 라는 생각은 들었는데 일단 닥치고 풀기로 했다.
뭐라하면 어쩔거냐.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것도 없는데.
그렇게 최소 80문제중에 10문제를 날려버렸다.

다른 곳에서는 한 영역 당 20문제를 15분 내에 푸는건데.. 자원관리능력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시험 중에 헛웃음이 나왔다.
앞에 두 지문 연계 문제는 일반 NCS 수준보다 쉬웠는데.. 뒤의 두 지문 연계문제는 PSAT 공부하면서도 못보던 완전 생소한 문제들이 튀어나왔다.
앞의 문제들이 쉬워서 빨리 풀고 넘어가는 순간, 모든 의욕을 상실했다. 지문을 아무리 읽고 대입해도 보기와 맞을거라 짐작되는것 조차 없었다. 무슨 난이도가 이렇게 중구난방인가 싶어서 어처구니가 없었다. 중간이 없네.
시험이 10분 남았는데 나머지 10문제는 개뿔 계속 봐도 감도 안잡히고..
다음 영역은 그냥 망했다. 앞에서 절반을 찍어서 모든 의욕을 상실해서 걍 집중이 안됐기 때문이었다.
앞에서의 패배감때문에 어차피 안될거라 생각하니 문제를 빨리 읽지도 못하고.. 그러니 당연히 풀이속도는 느릴 수 밖에 없었다. 리딩속도조차 느려졌는데 잘 될 리가 없지.

이때까지 위포트,해커스 수리,자원관리 NCS용 PSAT 실전서는 다 1회독씩 조지고 들어갔는데 이게뭐지....
왜 듣도보도 못하는 유형이 나오는거지..

그나마 다행인건 보기가 5개일때보다 4개일 때 개당 문제 풀이 속도가 빨라지긴 하는거 같다.
PSAT용 문제 풀면 제한시간보다 2배는 더 초과하는데 실제로 시험장에 가면 그거보단 빨리 푸는거 같다는느낌이 들긴 한다..
그리고 딱 봐서 완전히 접근방법조차 모르겠는 문제의 수도 줄기는 했다. 긴가민가한건 아직도 많지만..
그래서 오늘 더 멘탈이 터졌던걸지도..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문제집 풀면 아직도 한 문제당 풀이시간이 3분 30초에서 4분정도 걸린다.

근데 이런식으로 문제출제할거면 NCS보고 국가직무능력표준이라 하지 마라..
뭔놈의 표준이 기관마다 난이도도 다 다르고 한 문제지에 같은 영역 내에서도 난이도가 극단으로 갈리냐.. 중간이 없어요 중간이..
하지만 나는 을도 아니고 병,정,무 조차 못되는 인간이라 그냥 체념해야겠지.. 오늘도 피곤하다.

일단 올해의 목표는 틈틈이 PSAT용 책을 조지는걸로 해야겠다..
근데 남들은 PSAT용 책을 20권을 풀었다는데 그걸 어떻게 풀었다는건지 모르겠다..
시중에 NCS용 PSAT으로 나온게 위포트랑 해커스꺼만 다 합쳐도 6권밖에 안되는데..
다들 민간경력자용이나 국가직7급, 5급용도 다 훑는걸까.. 그런식이면 곤란한데.. 나는 언제 다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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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입버릇이 있지만, 항상 하는 말이 있다.
‘행복해지고 싶다’라는 말.
하지만 사실 인생에 있어서 행복의 시간을 찰나일 뿐, 대부분의 시간은 인고의 시간을 겪어내는 데에 지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든다.
인생은 잘 짜여진 소설이나 영화, 만화가 아니니까.
심지어 하다못해 소설도 주인공은 역경과 고난을 오지게 받는다.
일례로 해리포터 같은 경우는 1학년때부터 7학년때까지 매년마다 죽을 고비를 몇번이나 넘긴거니..

하지만 소설과 인생의 차이점은,
소설은 결국 주인공이 노력하면 성공에 이르지만, 현실은 그럴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행복해지는건 그만두기로 했다.
인생에 완벽한 때라는건 없다.
픽션에서는 영웅은 세상을 구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고, 사람들의 환대를 받는다.
공주는 왕자님과 만나서 행복하게 평생 산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젊어서는 다이어트와 외모, 취업, 부족한 돈 때문에 고통 받고.. 나이가 들면 노화현상과 건강 때문에 고통 받고..
결혼이나 연애는 해도 고민, 안해도 고민.
아이는 키우면 힘들고 돈이 들지만 같이 있으면 행복하고..
직장도 있으나 없으나 만사 괴로울뿐..
세상에 완벽하게 행복한 때라는 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행복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그만하고 싶어졌다.
완벽한 행복이라는건 평생을 살아도 불가능한거니까.
그래서 그냥 살아가기만 하면 되는걸 목표로 삼기로 했다.
굳이 행복이라는 불가능한걸 목표로 삼지 않기로 했다. 이뤄지지 않는건 아무리 노력해봤자 힘만 든다.
대신에 내 인생의 특정 순간들에 어떤식으로든 의미부여를 하기로 했다.
이건 소설도 아니고, 나는 작가도 아니지만, 어떤 사건에 대해서 내가 의미부여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의미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그건 상관없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내 이야기고 내 인생이니까.
그래서 이제 행복해지고 싶다는 생각은 줄이기로 했다.

뭐, 좀 안행복하면 어때.
사람이 안행복할 수도 있는거지.
꼭 행복해야만 하는건 아니니까.
내가 행복하지 않다고 해서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거나 땅이 꺼지지 않는다.

오늘 하루도 끝나서 다행이다.
일단 우리 가족 다 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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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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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가게에 나가지 않았다.
이력서를 2개를 썼다.
죄책감이 나를 짓눌렀다.
최근 1년간은 마치 죄책감이 내 신체의 일부인양 진득히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이었던건 마음에 작게나마 꿈을 품고 있었는데.
이젠 꿈도 사치다. 젊음은 다 지나가 버렸다. 기회도 사그러들었다.
거울을 문득 보니, 그 곳에는 내 얼굴 대신 절망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 절망은 내 꿈보다는 다른 것에 기인한 것이 더 컸다.
하지만 내 힘만으로는 어쩔 수가 없음을 뼛 속까지 알고 있다.
도대체 어디까지 떨어져야 바닥이 나오는걸까.
2년 전, 이게 바닥이라 생각했는데, 그 이후로도 한 없이 떨어지고, 또 떨어진다.
살려주세요.

내가 살아있는 게 고통스럽다...

Posted by 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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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침 하나에 죄책감 한 스푼,
다음 기침 하나에 또 다른 죄책감이 얹혀진다.
제발 살려주세요.
오늘도 간절히 바라본다.

사회로부터 받았던 상처들이 오래된 얼룩처럼 덕지덕지 마음에 붙어서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마음도 따뜻한 세제물에 담가서 팅팅 불려서 수세미로 벅벅 닦아냈음 좋겠다.
그러면 마음의 상처도 좀 사라질까?
날이 좋은 날에 따뜻한 햇볕 밑에 돗자리를 깔고 마음을 널어서 바짝 말리고 싶다.
마음이 뽀송뽀송해졌으면 좋겠다.

오늘 하루도 숨죽이며 지나간다.

Posted by 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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