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초와 중순에는 다양한 일이 있었다.



1.

일단.. 회사 일부 구역에 물난리가 났었다.
야근을 하느라 저녁까지 남아있었는데..
물이 터져서 같이 야근했던 과장님이랑 허겁지겁 내려갔다.
가보니까 이미 천장에서는 물이 콸콸콸
교대근무자들이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하나 당황하면서 뭐라도 하려는 상황이었다.
일단 흐르는 물이라도 막아보자.. 라는 느낌으로, 어디선가 구해온 거대한 김장김치 담그는 용도와 비슷한 비닐을 가지고
천장의 물을 막고.. 물을 빼내려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다들 온 몸으로 그 물을 다 맞아야 했다.

나도 그 사이에서 뭔가 하려면 좋으련만, 나는 애석하게도 일평생 엔지니어랑은 상관이 없는 공부와 업무를 해서 그런지..
할 수 있는게 별로 없었다.
물을 같이 비닐로 받아내다가.. 무겁고 중심을 못잡아서 기껏 받은 물이나 다 쏟아져서 나는 소리나 지르고.. ㅎㅎ.. ㅠㅠㅠㅠ
그래서 가운데서 잔심부름으로 보안팀에서 열쇠나 받고 문이나 열고..
흐르는 물들을 미화팀에서 빌린 스퀴저로 긁어내고..
바닥에 있는 물을 연신 습식 청소기로 빨아들여서 긁어냈다. 그래도 각 공종별 특징이 잘 나타나서 그 바쁘고 긴박한 와중에 내심 한 편으로 슬그머니 웃었다.
전기 쪽은 천장 텍스 젖는데 전기 감전 사고 나면 어떡할지 걱정하고..
공조 쪽은 그 와중에 일하는데 시원해야 한다고 에어컨 틀어주고.. ㅎㅎ
소방 쪽은 소방호스 찾아와서 누수된 물을 배출할 통로도 만들어주고.. 여튼 도중에 가구들이 침수되는데 어느 한 명이 멀티탭이 젖으면 어떡하냐 해서,
허겁지겁 내가 그 근처 물을 닦아내면서 다른 한 명이 멀티탭을 들었는데..
멀티탭이 물을 먹어서 들자마자 꺼졌다.
그거 보고 경악해서 또 소리질렀는데.. 그런거는 안전 상에는 문제가 없다는 말을 들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할 수 있는게 별로 없어서.. 청소만 열심히 하느라 도중에 집에가서 새벽 1시에 갔지만..
다른 분들은 원인을 찾고 그 사태가 마무리 될 때까지 새벽 4시까지 있다가 갔다. 그 때 사실 조금의 무력감을 느꼈던거 같다.
무언가 사태가 터졌는데 내가 실질적으로 그쪽 방면에는 아무 지식이 없어서 아무것도 못한다는.. 지금 일하는 이 부서는.. 가끔 나만 별나라에 떨어진 듯한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다들 전문성을 갖고 일하는데.. 나는 여태껏 일하면서 제대로 된 전문성을 살려보질 못했으니..
그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하지만 그 날은 그 부러움보다, 스스로에 대한 무력감과 부끄러움이 조금 더 들었던 날이었다.



2.

사실 1.의 사건이 있을 때, 내가 야근을 했던 건 다른 이유였다.
최근의 나는 고래싸움에 끼어있는 새우였다.
새우인 나는 연신 등이 터져가고 있었다.

현재 근로 조건 중의 한가지를 두고, 노조와 사측이 일방적으로 변경을 요구하던 참이었다.
정작 부서 내에 다른 동료들은 대다수가 반대하던 건이었는데..
그거를 막아보겠다고 팀장님을 비롯한 부서 내의 다른 상사분들과 회의하여 결과를 냈지만..
그걸 실질적인 정보로 꾸리는건 내 몫이었다.
어쨌든 그래서 8월 첫째 주는 사측을 설득위한 정보를 꾸리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했고..
거기에는 어느정도 효과가 있었던 듯 했다.

그러나 8월 둘째 주에는 노조를 위한 정보를 제공해야 했다.
어떻게 해야 최근 몇 달간 지속된 노조의 요청을 막을 수 있을까..
정작 동료들이 반대하는 일이라면 나는 어떻게든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걸 막지 못해서 일어났던 일은.. 이미 전 회사에서 한 번 겪었으면 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두 번 다시 비슷한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작정한 터였다.
또한, 나는 비록 엔지니어의 업무를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내가 인사분야에 전문가도 아니지만..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는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하지만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이라 너무 막막했다.
우리의 주장은 명확했지만 그 근거를 찾기가 좀.. 어려웠다.
인터넷 상에서 각종 근무형태에 대한 조직행위의 데이터를 찾고..
국가법령정보센터에서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 산업안전보건법, 중대해재처벌법 등의 법조항들을 찾아다니며 근거를 꾸리려 했다.

근무시간부터 정보를 수집했던 일은 어느덧 11시가 되어서 방향이 잡혔고
새벽 1시에 개요가 잡혔고, 4시가 되어서 내용이 총 정리가 됐고, 서식을 다 잡고 다 끝내니 5시였다. 그 날 오전, 결국 팀장님께 보고했지만..
정작 이번에 실제로 쓰이는 정보는 그 중의 일부분이었다.
그래도 수고했다 해주셨다. 일부분이어도.. 내가 정리한 자료가 제때에 쓰인다는건 참 다행이고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과업을 완벽하게 달성했어도 타이밍을 놓친다면 그건 완벽이 아니고.. 쓸데 없는거였다는걸 나는 여러 경험으로 뼈저리게 느껴왔었으니까..
조금이라도 적절한 정보였어서 타이밍에 맞게 쓰인다면.. 그걸로 됐다.


3.

그래서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결국은 공부를 제대로 못했다는 변명을 하게 됐다.
별 이변이 없다면, 이번 시험이.. 내 생애에 코트라 입사 시험을 보는 마지막 날이 될 터였다.
애초에 이번에는 안될거라 생각했으니..
코트라만 정하고 시험공부를 한 것은 아니었으니..
코트라만 생각하고 죽어라해도 붙을까 말까한 곳이니..
당연히 나는 붙을 일이 없을 터였다. 하지만 나는.. 이제는 오랜 꿈을 끝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과정이 다른 수험생들처럼 ‘옳은 길’을 ‘정석대로’ 가는 방법을 하진 못했다.
미시,거시,국제경제를 공부하고 경제신문을 읽으면서 현 시세를 익히고 필기를 합격하는게 정석인데..
나는 그 정석을 결국 해내지 못했으니까. 막판에 회사에 뒤늦은 여름휴가를 내고 집에서 공부했다.
하지만 나 스스로가 생각해도 여전히 부족했다.
그래서 시험보기 전 날 밤에.. 그냥 시험보러 가지 말까 생각했다. 하지만 2년 전에 코트라에 시험을 보며 느꼈던 감정이 있었다.
나는 그 날도 분명히 시험에 떨어질 거란걸, 알고 갔다.
미시,거시 경제를 1회독 밖에 못하고 갔고.. 경제신문은 제대로 읽지도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20대 때부터 내 막연한 꿈이었던 기업의 필기 시험을 보러 갔던 것이 너무 감격스러웠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시험을 끝나고.. 감독관이 위로의 말을 해줬던 것 같다. 오래되어서 잘 기억은 안나지만..
시험 보느라 고생했고 좋은 결과 있길 바란다고..
만약에 이번에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대도.. 다음에 좋은 기회로 다시 보자고..
그래서.. 어차피 내 오랜 꿈을 끝내려면 시험장에 가야만 했다. 새벽 6시 첫 차를 타고 8시에 시험장에 입실을 했다.
시험을 보기 막판까지 핸드폰으로 경제내용을 다시 훑고.. 최신 경제 정보들도 한번씩 훑고.. 시험에 임했다.
이번에 본 경제논술과 직무역량시험은.. 2년 전과는 달리,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다 적을 수 있었다. 나일롱으로 경제를 공부하고 신문을 읽었어도.. 꼴에 경험이라고 어느덧 답안지에 쓸 말이 잔뜩 생겼다.
그리고 몇 달 간 이 기업, 저 기업 시험에서 논술을 쓴 경험이 있다고..
둘 다 시간 내에 논술 답안작성을 끝내긴 했다.
사실 경제 논술은.. 5분만 더 있었다면 좋았을걸.. 이란 생각을 했지만..
그래.. 경제 논술은 사실 시간이 조금 부족했다..

여하튼 시험 도중의 휴식시간이나, 시험이 끝나고 교실 문을 나서기 전에도..
한참이나 시험장 구석구석을 돌아봤던거 같다. 이번이 마지막인걸 여실히 느껴서 그런지..
이 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했다.
시험이 끝났다는 말은, 어느덧 나는 내 꿈의 씁쓸한 결말로 또 성큼 다가간 것이기 때문이다.
시험이 끝나고.. 책상에 내 수험번호가 쓰여져 있던 라벨지를 기념으로 챙겨 나가면서..
집에 가려고 길을 걷는데 왠지 눈물이 찔끔찔끔 나왔다. 시험을 본 직후에 바로 울었던건.. 실로 수능 이후에 처음으로 있었던 일이었다.

20대 내 막연한 꿈의 끝이었다.
20대 때, 너무 막연하게도 ‘나는 아마 안될거다’라며 지레짐작하며 포기한 회사였다.
하지만 그래도 막연한 꿈은, 이상하게도 해외 한번을 나가본적이 없는 나에게.. 20대동안 외국어를 공부할 수 있는 동기를 만들어 주었다.
30대 초에 퇴사를 하고 이직에 여러차례 실패했을때..
어느 덧 문득, 내가 가진 스펙이 그 회사의 서류전형에는 통과할 정도로 바뀌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차피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중소기업들은 내 나이와 관련 경력의 부족을 이유로 이직을 거부하는데..
그렇다면 이제는 힘들어도 그토록 가고 싶었던 꿈의 기업에 마지막으로 도전을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시작도 전에 각오하고 시작했건만..
실제로 마주한 경제학은 너무 이해하기 어려운 것 투성이었다.
이해가 안되니 암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나는.. 부끄럽지만 남들보다는.. 공부에 특화된 지능이나 습관이 부족한 인간이었다.. 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 자신에게 의미는 있었다.
사람들은 흔히.. 어떠한 것을 성취하지 못하고 미련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어차피 이루지 못할걸 왜 하냐고.. 그러니까 내가 안된다고 하지 않았냐고..
그런데.. 지난 몇 년간의 경험을 하면서.. 지는 싸움이어도 해야만 하는 싸움이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그걸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스스로’가 하기로 정한 싸움이었다면 말이다. 비웃음과 응원 중, 주변으로부터 더 받았던건 비웃음이었다.
하지만 분명 그 와중에 조금씩 변하던 내가 있었다.
원하는 지점까지는 도달하지 못해도.. 내가 가고 싶었던 분야의 지식이 차츰 쌓이는게 있었고..
나에겐 사치였던 꿈과 희망을 품을 동안에는.. 그래도 잿빛이었던 내 인생이 조금은 컬러풀해진것만 같았다.

하지만 꿈을 품고 산다는건 마냥 행복한건 아니었다.
목표치를 도달하지 못한 내 모자란 현실을 마주해야 했고..
항상 도착점에 도달하지 못할까봐 무수히 많은 불안한 밤을 보내야만 했다.
그래도.. 의미는 있었어..
사실 아예 슬프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나는 내 꿈에 도달하기 위해 살아봤다.
이번엔.. 이 마음만 가져가야겠다.

슬픔도.. 눈물도.. 어서 빨리 묻어둬야지.
인생은 원래.. 비가 그치는걸 기다리는게 아니라.. 엉망진창인 폭풍우 속에서도 춤추는 방법을 배우는거라 했다.
나는 내일도, 모레도 다시 폭풍우 속에서 춤을 춰야 하니까. 그러니까 오늘까지만 슬퍼하겠다.

'못다한 이야기 > 오늘도 하루를 산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2년 10월 말의 단상  (0) 2022.10.23
요즘은 삶에 의욕도 없고, 재미도 없다.  (3) 2022.09.08
2022년 7월의 이야기  (0) 2022.07.27
2022년 5월의 단상  (4) 2022.05.27
혼자 있고 싶다.  (0) 2022.04.27
Posted by 지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