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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24.05.26 . 2
  4. 2023.12.03 2023년 12월 초의 단상 7
  5. 2023.05.20 최근에 면접을 봤다 1

음.. 되게 오랜만에 블로그 포스팅을 작성해본다.
최근 반년동안 너무 바쁘기도 했고.. 정신이 없었기도 했고.. 그 많은 시간들을 어떻게 정리할지도 모르겠기도 했어서..
그리고 나는 일기 쓸 때 내 부끄러움(?)을 블로그에 적는 느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다..
그렇지만 최근 2월 말, 3월 말에 달린 댓글을 보며.. 이제는 새 글을 써볼까 한다.
(9월에 썼던 글은 비공개로 바꿨다가 다시 공개글로 바꾸었으니.. 혹시 궁금하시면 보고 오세여.. ㅎㅎ)


1.

9월부터 3월 중순까지 정신 없는 야근 대잔치가 벌어졌다.
연말이 가면 갈수록 일이 계속 몰리고..
아침 10시에 출근하면 밤 11시에 퇴근하고..
집에 도착하면 밤 12시, 인터넷 깔짝하면 새벽 1시..
또 아침에 일어나면 1시간만에 후딱 대충 밥먹고 씻고 나가서 다시 10시부터 일 시작..
가끔 어떤 금요일에는 회사에서 잠을 자고 토요일 오전까지 일하다가 집을 가는 일이 한 3주정도 있었다.
그렇게 일을 하다보니.. 어느 날 밤에는 내가 쓰러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일하다가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실제로도 들었으니까..
이게 20대때의 체력과는 다른 점인가..
전에는 출근 편도가 20분이었는데.. 이제는 4,50분이어서 더 힘든건가..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치만 아직 30대 중반이라.. 죽지는 않더라 ㅋㅋㅋㅋ ㅠㅠㅠㅠㅠㅠ

남들이 사라진 사무실에서 혼자 일하는게 너무 힘들었지만.. 연말에 밤 11시에 회사 중정에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면.. 그 트리 위의 노란 불빛이 나를 조용히 위로해줬다.

까만 밤, 눈이 소복이 내리는데, 혼자 노란 전구를 둘둘 둘러감은 크리스마스 트리..
회사 모든 사무실의 불이 꺼져 있었지만.. 그냥 그 트리를 보고 있으면 나 혼자 있는건 아닌거 같은 기분이 들어서..

12월 말로 갈수록 더욱 바빠지기 시작했다.
연말이라 일이 몰리기 시작했고, 게다가 서무업무까지 맡게 되어서..
왜 이렇게 연말에는 그놈의 보고서들을 취합해야 하는게 많을까.. ㅎㅎ
그래서 3주 연속 금요일 밤에 회사에서 잠을 자고, 다음날 일어나서 일을 하고 도망가고는 했다.

히터도 안드는 그 추운 밤, 휴게실 침대에는 얇은 이불들 뿐..
나는 내 고단함을 이기고자, 이불 위에 내 롱패딩을 덮고, 핫팩을 끌어안고 잠이 들고는 했다.
그나마도 추워서 자다깨다 반복하며 한숨 자고..
아침 7시 무렵에 반쯤 졸린 채로 휴게실에서 나갔을 때, 회사 창 밖으로 보이는 12월 말의 일출이 너무도 아름답고 헛헛해서.. 그 날은 왠지 기분이 묘했던 기억이 났다.


2.

사실 작년에 나를 괴롭히던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블로그는 키워드가 검색이 되기 때문에 정확한 키워드를 쓰기가 사실 조심스럽지만, 영어로 쓰자면 Bullying 혹은 Harassment, 일본어로 하면 パワハラ였다.

개인적으로 남의 돈 버는 10년 만에 겪는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나는 3,4번째 신입이면 이제는 기존의 시행착오를 다 겪고 더 좋은 신입이 되어서 더 빠른 적응을 할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무색하게 나는 빠르게 기운을 잃어갔다.

직전 회사에서는 약 100명의 사람들과 일하면서 두루두루 잘 지냈었는데.. 이번 회사에서는 일적으로 나 혼자 고군분투하는 와중에 パワハラ를 견뎌내야만 했다.

회사에 출근하는 매일매일이 지옥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느낌이었고,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냥 살아있는거 자체가 매일매일을 형벌을 받는 기분이었다.
그치만 야속하게도 내 애플워치는 항상 내 심박수가 정상임을 보여주고는 했다.

블로그가 공개적인 장소라 자세하게 쓰지는 못하지만, 매일이 힘든 나날이었던 것 같다.
집에서 엄마와 얼싸안고 울었던 날도 있었고..
일을 진짜 너무나도 관두고 싶다 못해, 어느 날은 그냥 플러그를 뽑듯 삶이 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사실은 꽤 여러 날동안, 꽤나 자주 해왔다.

「私、実はさ、あんたが早く会社辞めるかな-と思ったよ。
でも辞めるな。あんたが辞めると、他の人を採用するまでに時間がたくさん掛かるんでしょう?」
어느 날의 회식에선 상사로부터 위 말을 대놓고 면전에서 들어야만 했고.. 그 말을 듣고 다른 팀원이 웃었을때..
나도 힘겹게 웃어보였지만 사실은 괴로웠다.

일을 관두고 싶었다. 너무나도.
혹은 이제는 삶에 대한 기대가 점차 불씨가 꺼져가듯 줄어들었다.
이때까지 힘들게 고군분투하며 어떻게든 잡은 직장이지만, 그냥 모든게 다 부질없었다.

근데 나는 이미 19년도에 내 인생 첫 사주를 봤을 때,
“너 올해는 힘들었을텐데 관두지 말아라. 힘들때 그 회사를 관두고 딴데 갔었어도 너무 힘들었을거다. 그런 시기가 있다”라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다.

그래서 진짜 너무 관두고 싶었지만.. 그래, 예전에도 이런 말 들었었는데.. 이 1년만 버티자.. 어차피 1년은 지나갈거야. 라는 마음으로 꾸역꾸역 살아냈다.


3.

이런 나를 잡아준 건, 내 가족들과, 나에게 일어난 일은 잘 모르면서도 점점 시들어가는 나를 걱정해준 회사의 몇몇 상냥한 사람들 덕분이었다.

회사에서 가끔 만나는 그들의 한 마디가, 그들의 미소가, 나를 지옥불 속에서 구하고는 했다.
부글부글 끓는 열탕 속에서 바짝 삶아지고 있는 것 같은 억겁의 괴로움 속에도, 그들이 건넨 상냥함들이 마치 산 위의 산들바람처럼 나를 위로해주고는 했다.
아마 그들이 내게 준 상냥함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쯤 다른 결말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집 안에 있는 달력마다 ‘이때는 꼭 퇴사해야지’라고 동그라미 치기도 했고..
매일 밤.. 하루에 12시간씩 회사에 갔다가 집에 돌아와서 잠드는 밤이면.. 이대로 제발 내일부터 깨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는 밤이 조금씩 늘어났다.

그러던 작년 연말을 기점으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바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서웠던거 같다.
그 다음에는 실감이 안났었다.
그 다음에는 사무실에 있을 때 심장이 빨리 뛰었던 증상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일은 연말에 몰리고, 정말 죽을거 같고 힘들었지만, 한편으론 약간의 숨이 쉬어졌다.


4.

그렇지만 최근 들어 업무공백이 많이 발생하고.. 그래서 나한테 업무가 점점 몰려오고 있다.
야근을 해도 해결이 안될 정도로 많은 일이라니.. 작년 말에 처음 느꼈던 두려움을, 4월을 맞이한 지금까지도 여전히 느끼고 있다.

나는 여전히.. 사회생활 10년만에 처음 겪는 온갖 역경과 시련들을… 최근 1년 반동안 종합선물세트로 계속 때려 맞는 중이야..

근데, 나는 이때까지 예전의 다른 포스팅에서도 썼지만..
나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폭풍우 속에서도 절대 지지 않을거야.

비록 원하던 원대한 목표를 성취하지는 못했더라도, 나는 그 근처까지는 가봤던 사람이니까,
나는 예전에도 사회생활하면서도 내 꿈 이루려고 주경야독했던 사람이니까,
2년의 공백기동안 매일 공부로부터 도망치고 싶었어도 책상에 앉아서 스톱워치로 시간 재가면서 공부해봤던 사람이니까,
남들한테 안좋은 소리를 듣고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순간들 속에서도, 또 누군가의 상냥함을 받고 다시 일어나려 했던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나는 괜찮아.
지금의 어려움도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거다.

여기서 져버리기엔 과거에 열심히 살았던 김지인들이 나를 응원해..
지금의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들의 상냥함이 나를 붙잡아..

사실.. 지금도 너무 도망치고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제는.. 역경을 헤쳐나가면서 점차 근사하고 우아해질거란걸 믿어 의심치 않아.
나는 김지인이다.



+) 최근 내가 너무나 좋아하고 항상 닮고 싶은, 나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생각이 깊은 동기의 얘기를 듣고, 일의 압박이 많을 때, 어느날 문득 대책 없는 여행을 가고는 했다.

어느날 문득 부산 전포동에 ‘모모후’라는 카페를 갔는데..
커스타드 푸딩이 너무 너무 맛있어서 감동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원래 커스타드 푸딩에도 약간의 계란 비린내 때문에 거부감이 있었는데.. 여기는 어찌나 맛있기만 하던지…

메론소다도 진짜 맛있었당.. ㅎㅎㅎ

사장님..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적게 일하시고 많이 버세요..

그 날.. 대전에서 부산까지 잘 왔다며 말 걸어주셔서 너무 감사했어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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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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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올 4월부터 틈틈이 다시 공부했던 전산회계 1급을, 드디어 8월 중순에 취득했다.
시간이 부족해서 많이 걱정했었는데…
2문제를 날려서 70점을 못넘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런 내 걱정이 무색하게도 80점으로 무난히 합격했다.
휴… 다행이다.
아직 내 머리는 완전히 죽지는 않았나보다.


2.

최근의 회사는 매주마다 새로운 일이 일어난다.
분명 말단 신입인데.. 이 업무는 여기서 처음 하는건데..
다 김지인 탓이라는 말을 벌써 5번 이상 들었다.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마치 내가 한 말처럼 회사 내에서 망령처럼 돌기도 하고..
내가 뒷말 안나오게 하려고 얼마나 조심하며 다녔는데..
그 와중에 일은 너무 많고, 손에 익었다고 생각하면 또 새로운게 나타나고…
내 일거수일투족이 이 회사에서는 험담 대상이었다.

이 때까지 사회생활을 나름 길게 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이때껏 내 전 직장의 동료들에게 얼마나 많은 배려를 받았던가..
왜 이 곳은 기존의 경험과 다르게 사람들을 헐뜯으려 생 난리를 치는걸까..

어느 출근하는 날에는 심장이 너무 빨리 뛰었고, 내 심장을 누군가 움켜쥐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 날은 하루 왠종일 민원에 시달리다 집에 오면.. 기분이 너무 다운되어서.. 무언가 새로운 공부를 하려고도 해봤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은 날도 있었다.
어느 금요일의 출근길에는 월요일의 출근길이 걱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대다수의 퇴근길에는.. 집에 갈 힘이 없어서 회사 근처의 어딘가에서 30분씩 멍때리다 갈 때도 있었고..

블로그가 공개적인 장소이기 때문에 여기까지만 적는거지만..
나는 36살에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은 늙은 아이가 된 기분이 든지, 어언 10개월째였다.


3.

8월 중순엔 내 생일이 있었다.

내 생일 전전날의 주말에, 동생이랑 엄마가 성심당에 웨이팅을 걸고 2번이나 성심당을 왔다갔다하며 생귤시루를 사왔다.
너무 기분이 거지같았는데.. 내가 뭐라고 동생이랑 엄마가 생귤시루를 이렇게 힘들게 사왔나..
너무 많이 기쁘고.. 슬펐다.

정작 내 생일에 원래 하던 일과 더불어, 팀장님이 마감기한을 갑자기 재촉한 일로 인해서 나는 또 생일에 야근을 하게 됐다.
팀원 누구도 축하해 주지 않는 첫 생일..
저녁 8시에 부랴부랴 문을 닫기 직전인 꽃집을 찾아가서, 나 자신을 위한 수국을 샀다.

친구한테 선물 받았던 책도 간만에 읽었다.
‘율의시선’이라는 책이었는데..
본인을 ‘북극성’이라고 칭하는 아이의 서사가 너무 슬펐다. ‘북극성’을 봐야만 했던 상황과, 그걸 자신과 동일시 해야만 했던 감정이 이입되어서 벅찼다.

8월 하순에는 내 생일을 맞이해서 수원에서 친구가 놀러왔다.
에듀콘 때 처음 만나서 그 이후로 친해진 친구였다.
내 생일을 캘린더에 기록해놓고, 일부러 내 생일을 축하해주려고, 날 보기 위해 그 먼 길을 일부러 찾아왔다.
그 날도 어김없이 회사에 안좋았던 일이 일어났고,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서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나도 모르게 신세한탄을 했었다.
다 큰 성인 여자가 초밥을 먹으면서 우는게 많이 꼴불견이었겠지만, 그 친구는 아랑곳하지 않고 울어서 감정이 해소되는 경우도 있으니, 마음 편히 울라고 했다.
그 친구는 그랬다.
사람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건.. 주변에 내 편인 사람이 없어서인거 같다고.. 너무 힘들어서 벅찰 때는 서로 이야기 하면서 곁에 있어주자고..
그 마음이 너무 벅찼고 고마웠다.
꽃을 하나 받았는데, ‘영원한 행복’이라는 꽃말을 가진 노란 꽃이라고 했다.
보통 꽃이 지면 버리는 편인데.. 이 꽃은 도저히 버릴 수가 없어서, 꽃잎만 따로 떼서 자그마한 병에 넣어놨다.
아마 그 날 일은 시간이 지나도 못잊을거 같아.


4.

8월 말에는 옛 회사 동료들과 인천을 갔다.
인천으로 이직한 옛 회사 동료를 보러 가는 여행길이었다.
오후 3시에 차를 탔는데 인천을 도착하니 오후 9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차에만 5시간 넘게 갇혀있었다 ㅋㅋㅋㅋㅋ
그래도 운전해준 친구가 데이식스 노래를 많이 틀어줘서 좋았다.
거의 다 그날 처음 들었는데.. 그 노래들 중에 좀비, 때려쳐는 회사로 돌아와도 출퇴근 할 때 많이 들었던거 같다 ㅋㅋ
왠지 내 마음을 대변해주는거 같아서 속이 시원했다.

인천에서 낙지육회탕탕이 조지고, 2차로 양고기 먹고, 3차로 떡볶이 같은거 먹었다.
술자리에서 딱히 특별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많은 친구들과 즐겁게 술마시고 떠드는게 즐거웠다.

글고 인생네컷을 난생 처음으로 찍었다 ㅋㅋ
내가 늙은이이기도 하고 ㅋㅋ 사진찍는걸 평소에 안좋아해서 안찍었는데.. 다같이 시끌벅적 찍으니까 너무 좋았다.


5.

그리고 9월 초에 회사를 돌아왔는데 일이 터졌다.
또 나 때문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냥 이제는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고, 무기력해졌다.
그런 나를 국장님이 잠깐 이야기 하자고 부르셨다.
나는 그만 국장님 앞에서 울어버렸다.

예전 같았으면 일을 잘하든 못하든 일을 털어내려고 그렇게나 노력했을텐데..
지금도 일이 쌓여있으니까 하고는 있지만..
이젠 멘붕이 너무 와서 더 이상 일을 집중할 수 없었고, 일을 하다가 바람을 쐬는 날이 많아졌다.

어느 날부터인가 심장이 너무 빨리 뛰었다.
그래서 무언가를 끌어안지 않으면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부터는 식욕이 줄었고, 배가 아팠고,
또 다른 어느 날에는 금요일 출근길부터 월요일 출근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전히 사무실에서는.. 매주마다 새로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래로, 처음으로 일에서 자부심을 못느끼고 있다.

어제는 집에서 혼술로 맥주 3캔을 연달아 마시고..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빈 맥주캔과, 전 날 내 눈물을 닦았던 휴지덩이들이 사라져있었다.
엄마가 치웠겠구나 싶어서 마음이 너무 아프고 착잡했다.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도저히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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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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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저녁이었다.
한 공공기관 정규직이 된지 반년하고 10일 남짓이 지났을 무렵, 나는 더이상 회사원이 적성에 맞지 않는걸 깨달았다.
이제는 다른 회사에 이직하려는 일말의 에너지조차 남지 않았다.
나는 서른 여섯에, 모든 방향을 잃어버렸다.
열심히의 결과는 고작 이것이었고.. 또 다른 열심을 하자니 매일 회사에서 버티는 순간만으로도 벅찼다.
나는 그만 전원 코드를 갑자기 뽑아버리는 컴퓨터와 같이 내 인생도 그냥 그저 그렇게 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불과 자정을 1시간 50분 남은 오늘의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시간은 조용히, 내 숨을 조여가며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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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오랜만에 쓰는 블로그 글이다.
전에는 한 달에 한 번씩 글을 쓰자고 다짐했건만, 나아지지 않는 현실 속에서 그 결심조차 부끄러워졌다.
내 인생이 만약 해리포터 같은 베스트셀러 소설이고, 내가 주인공이었다면, 나는 벌써 내가 하고 싶었던 모든 것을 이뤄내고, 해피엔딩을 맞이했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소설 속의 주인공이 아니었고, 결국 다시금 마음먹었던 꿈의 기업은 입사하지 못한 채, 올 12월을 맞이하고야 말았다.

그 사이의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어떤 말부터 적어야 할지.. 몇 달 째 내 머릿 속에 헝클어져 있던 생각을.. 이 글 하나로 다 정리가 될 지.. 오늘은 그것조차 자신이 없다.



1.

올해 5월, 그러니까 이 글의 직전 글에 면접 준비하던 때의 글은, 올 상반기 코트라의 지방 지부의 전문직 관련 채용 면접을 준비하던 때의 일이었다.
무역관련 3개의 자격증, 그러니까.. 무역영어, 국제무역사, 원산지관리사가 통했던 덕분일까..
어떻게 기회가 오게 되어서, 하루동안 필기시험, 영어면접, 1차 면접을 보게 되었다.
필기 시험에서 1차면접까지 단 40분의 시간동안 점심식사를 해결하는게 쉽지 않았다.
1시가 지나고 1차 면접을 보게 됐지만.. 전시회를 기획해보지 못한 나는.. 또다시 논문으로 상을 받아보지 못한 나는.. 결국 그 회사에 맞는 인재가 아니었음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작년 하반기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일련의 시간들을 겪으며 느꼈던건..
나는 결국, 통상직도, 전문직도.. 최종합격까지 가기에는 부족했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기존의 내 전공이 아닌 다른 분야의 논문으로 상을 받거나.. 교내 영자신문 기자가 되거나.. 해외영업을 하는 등의 경력을 가지는건.. ‘나’의 경험에 부합하지 않았어서..
만약 리셋버튼이 있어서 20살부터 다시 살아갈 수 있다면.. 혹여나 가능하겠지만.. 이미 서른 다섯번 째 해를 살아낸 나에게는.. 이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31살에 뒤늦게 무역사무를 가려고 준비된 어학과 자격증을 갖추었어도.. 결혼하고 애낳아야 할 나이때문에, 경력이 맞지 않아서, 지방대 출신이라.. 등과 같은 이유로 무수히 많은 중소중견기업의 서류, 면접을 넘기지 못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해외를 한 번도 나가보지 않아도.. 업무적으로는 외국인이랑 의사소통이 될 정도의 외국어 실력을 갖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 ‘해외를 나가서 오랫동안 외국인과 부딫혀본 경험’이 없다는게.. 결국은 내 발목을 붙잡아왔고.. 만약 계속 이 분야를 도전한다면.. 앞으로도 붙잡힐 것임을 알게 되었다..

24살, 학부를 졸업할 때는 그냥 토익 960점에 JLPT N1 쪼가리 따위나 있는 머저리 취급을 받았었고..

25살부터 실제로 업무를 시작하면서..
제 아무리 한국에 있는 외국인에게 영어로 한국어 과외를 했다 한들..
일본어로 일본인 딜러한테 통역을 해줬다고 한들..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 뿐만 아니라 모국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자기네 나라 말의 억양이 섞여가며 영어하는 것도 어느정도 알아듣고 소통했다고 한들..
어차피 해외영업에 근무할 게 아니라면.. 이직할 때는 참.. 사기업이든 공기업이든.. 그렇게도 인정받지 못하던 시간들이었다..
근데 웃긴건.. 그렇다고 내 성격을 외향적으로 바꿀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 외국물을 한번도 먹어보지 못해도 어느정도는 2개의 외국어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이상은 자랑스럽지 않아졌고.. 그냥 이게 나의 특성이구나.. 싶은 부분이 되었다.
그렇게 돈벌이를 하려고.. 그리고 돈벌이를 하면서 앞으로도 더 실력을 키워나가겠다며 내 나름대로 노력해왔던 시간들이..
결국 꽃을 피우지도 못한 채로 그대로 먼지에 쌓인 지.. 올해로 벌써 4년째였으니까..

올 상반기 5월 말에, 결국 전문직 1차 탈락이란 결과를 받고..
밤에 아무도 없는 빈 사무실에서 혼자 그만 짐승처럼 꺽꺽 울어버렸다.
이제는 정말 20살부터 시작해왔던 내 오랜 꿈이 완전히 끝났음을 알게됐기 때문이었다.
이 때까지 내 나름대로 열심히 살지 아니한 것은 아니었으나, 최종관문, 그 한 발자국을 넘기에는 내가 살아왔던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에..

나는 여태껏 까만 밤하늘의 북극성을 보며 목적지를 찾아간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결국 태양을 향해 날아가다가 날개의 밀랍이 녹아서 하늘 위에서 추락해버린 이카루스가 된 마냥..
몸과 마음이 산산조각나는 것만 같았다.

산산조각난 마음을 끌어안고 나는 생각했다.
‘이 때까지 경제 논술 위주로 준비했었는데.. 망했네.. ㅎㅎ 나 경제도 사실 그렇게 잘하지는 못하는데..
내 장점이라며 20대 내내, 30초반까지 준비해왔던 영어도, 일본어도 못살리고..
이제 어쩌지?’



2.

2023년 6월부터, 나는 회사에서 저녁을 먹고, 회사 근처의 카페로 가서 다시금 공부를 시작했다.
이번 공부 과목은.. 경영과 경제..
경영은 전공이었지만.. 학부를 졸업한 지 10년이 넘었다..
그래도 나는 내 전공 좋아했으니까..
경제는 정말 괴로워하며 ‘나는 빡대가리인가’라며 공부해왔지만..
그래도 공부하면서 어느 순간 경제신문의 기사들이 이해되기 시작했고..
그래도 어느 순간 통합전공, 혹은 상경통합의 경제학 문제들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으니까..
계산문제는 조금 힘들어도.. 말 문제의 보기들이 이해가 됐고, 답을 조금씩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덧붙여.. 이제는 회계도 조금씩 공부하기 시작했다..
원래 재무회계, 원가회계까지 공부했던 경험이 있고.. 각종 계정과목과 부가가치세까지 대략적으로 공부한 경험이 있으니까..
학부 때는 그렇게 치를 떨던 재무 파트도.. 아직도 많이 어려웠지만..
미시,거시 경제를 배우고 난 뒤에 다시 훑어보니.. 의외로 익숙한 그래프들이 나와서.. ‘어? 너? 니가 왜 거기서 나와?’ 라며 새삼 놀랐다..

그리고 나는 이제 다른 공공기관의 공고에도 서류를 내기 시작했고, 필기시험을 보러 갔다.

사실 쉽지 않았다.
회사를 다니면서 매달 몇 개씩 자소서를 써서 내야하는 것도,
거의 2주마다 한 번씩 서울이며 지방이며 돌아다니며 필기시험을 보는 것도..
또 무슨 행사마냥 필기가 끝난 후엔 당연히도 ‘불합격’ 통보를 받는 것도..
다 너무 지치고 마음이 상하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퇴근 후에 카페에서 1~2시간씩 매일 공부하는 것을 다시 습관으로 잡는 것도 쉽지 않았다.
시험이 없는 주말 내내 공부를 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그치만 6월, 7월, 8월, 9월.. 넘어가며..
주중에 카페에서 음료 하나 시켜놓고 공부하는 것은.. 어느덧 내겐 힐링의 시간이 되었다.
저녁을 먹고, ‘카페 마감 시간의 20분 전까지 최대한 집중해서 공부한다’가 내 목표였다.
저녁 공부를 끝내고 달력에 ‘참 잘했어요’ 스티커를 붙이면, 그 날은 뿌듯함을 안고 잠이 들었다.

이제는 너무 초조하지 않기로 했다.
전전긍긍해가면서 내 인생 바꿀거라며 공부했던 무역자격증 3개로도.. 결국은 내 인생을 바꿀 수 없었고..
코트라, aT 가겠다며 전전긍긍하면서 경제학 공부하고 NCS 공부하고 한국사 자격증 땄어도.. 그것들이 결국 내 인생을 바꾸진 못했으니까..
오히려 불안하기만 하며.. 걱정하느라 현재에 몰입하지 못하고 헛되이 보낸 시간들이 나 스스로를 절망에 빠뜨리고 숨통을 조여왔다고 생각했다.

나는 하루에 많은 시간을 집중하지는 못해도, 단기간에 뭔가를 해치우는건 잘 못해도, 무언가를 꾸준히 하는건 자신이 있었다.
한 분야에 일을 꾸준히 해왔던 경험도 있고, 일을 하면서도, 심지어 야근을 해도.. 시간을 쪼개어 꾸준히 어학공부를 해왔던 경험이 있었으니까.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도, 저녁에 외국어를 공부할 때엔.. 마치 내가 해외에 나와있는 사람인양, 행복해하며 몰입했던 경험이 있었으니까.

일을 하며 공부하는 경험은.. 내가 사회생활을 해왔던 지난 8년동안 꾸준히 해왔던 일이었기 때문에..
만약 합격 불합격을 떠나서 공부를 한다는 것에 취미를 붙인다면.. 그거는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을 바꿨다.
어차피 이렇게 또 경로를 틀은 이상.. 한동안 합격은 어려울텐데.. 새로운걸 배워가는 재미로, 또 내가 예전 대비 현재는 점수가 얼마나 오르는지.. 필기시험 결과를 목표로 시험준비를 하자고..



3.

어느 날은 서울에서 시험을 보는데.. 전공시험 때부터 한강에서 BTS페스타 때문에 시험장까지 한 시간 내내 소음이 들렸던 적도 있었다.
시험이 끝나고.. 한강을 걷는데.. 이미 보라보라한 사람들 속에서.. ‘한강은 별세계 같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친구와의 약속이 잡혀서.. 3시간동안 뭘할지 고민하다가.. 페스타와는 한참 떨어진 곳에서 강변 테이블에 앉아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날은 화창했고, 한강에는 요트가 떠다녔고, 바람이 불었지만, 여름이라서 더웠다.

공부를 하는데, 어디선가 연세가 지긋하신 남녀 약 10여명이 내 자리 근처로 다가왔다.
나주에서 오랜만에 어린시절 동창생들이 서울로 놀러왔다고 하셨다.
“공부하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 지금 자리가 없어서 그러는데 같이 앉아도 되겠냐”고 물으시기에, 별 생각없이 괜찮다고 했다.

근처에 아이스께끼를 팔던 상인이 있었는데, 그 분들께서 아이스크림을 사 드셨다.
나도 먹으려고 지갑 속의 현금을 손으로 꼼지락 거리고 있는데.. 그 분들이 내 아이스크림까지 같이 사주셨다.
감사해하며 더운 여름에 차가운 아이스께끼를 먹고 있는데..
한 분께서 내 책을 보더니.. 공기업을 준비하냐 물어보셨다.
필기도 잘 못붙는 터라..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져서 어물쩡거리며 맞다고 했더니..
한 분께서 본인도 최근에 은퇴하셨다며.. 이렇게 주말에 야외에서도 공부하는게 기특하다며.. 꼭 우리 공기업에 들어오라 하셨다.
그리고 본인의 기업명을 적어주셨다..

그 기업명을 보고..
‘네? 저 얼마 전에 신의 직장에 떨어졌는데.. 또 다른 신의 직장에 지원하라고여? 제가여? 할 수 있을까여?’라고 생각했지만 차마 그 분께 말은 하지 못했다.. ㅎㅎㅠㅠ
그치만 그 다정함에 감사해지는 토요일 오후 4시였다.



4.

2주 전에 aT 필기시험을 보고 왔다.
이 때까지 본 필기시험 감독관님들 중에 역대급으로 잘생기신 분이 계셔서 개놀랬다.
지난 10년동안 봤던 공공기관 필기 감독관 중에 역대급 미남이라.. 세상에.. 살다보니 이런 일도 다 있구나.. 너무 신기했다.
이 때까지 한번도 누군가한테 번호를 딴 적이 없었는데.. 마지막에 시험 끝나고 집가면서도..
‘더 늦기 전에 번호를 달라고 해볼까?’라고 수많은 내적 갈등을 했지만 결국 따지 못했다.. ㅋㅋㅋㅋㅋ ㅠㅠㅠㅠㅠ

그치만 내 딴에 시험은 진짜 열심히 봤다.
결과가 나왔는데.. 내가 이제까지 본 aT 시험 중, 논술시험을 제일 잘봤다.

오랜만에 본 aT 필기 시험 문제는.. 예전과는 문제의 기조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번에는 농업 관련 문제가 거의 안나오고.. 경제 관련 문제만 2개의 문항..
그 중 하나는 농업 관련 썰을 같이 풀어야 하긴 하지만..
예전처럼 KREI 보고서를 1년 치를 본다고 과연 이 문제를 풀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드는 문제였다..

그치만 또 불합격.. 예..
근데 또 산술평균 내보니까 내가 합격선보다 높게 나온거 같은데 불합격이래서..
왜 또 불합격이지? 라고 생각하고 가중평균으로 계산해보니..
예.. 또 합격선이랑 2점 차이 나고여..
또 NCS에서 발렸고여..

하.. 진짜.. 내가 시중에 나온 NCS 봉투모의고사도 거의 다 풀었는데..
이제 PSAT형이든 모듈형이든 문제 유형은 어느정도 다 파악해서 문제도 80% 이상 다 맞는데..
시간 단축이 죽어라고 안된다..

그리고 아마.. 큰 이변이 없다면 이번이 내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보는 aT 시험이 될 터였다.



5.

그치만 결국 한 달 전, 이번에 한 지방의 공공기관에 이직하게 되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상사께 보고하는 능력, 산업에 대한 이해, 논술관련 스킬 등이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면접에서 대놓고 ‘우리랑은 하나도 호환이 안되는 경험이네요’라며 면접 내내 쪼인트를 까인게 수차례..
그치만 나는 어떤 상황이든 여유가 있어야 했다.
내가 면접 자리에서 여유가 없는 모습을 보인다면, 이건 단순히 ‘나’ 스스로에 대한 것 뿐만 아니라, 지금의 나와 같이 일하고 있는 직장과, 팀에 대한 예의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결국 한 번의 필기와 두 번의 면접을 모두 통과하게 되었다.

부랴부랴 인수인계서를 작성하고 내 업무를 다 쪼개면서..
많은 동료들의 아쉬움이 섞인 축하를 받았다.
일주일 새에 약 백 여명 가까이 되는 동료들의 아쉬움과 축하를 받고 있자니..
새삼 내가 2년 넘게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과 업무 협업을 해왔구나 싶어서 놀랐기도 했고,
축하해주심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깊은 감사함을 느꼈다.

마치 머리 위로 별빛이 쏟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25살에는 전체 인원이 50명인 중소기업에서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했는데..
35살에는 사내에서 협업했던 동료들만 백 여명이었다니.. ㅎㅎ


그치만 이제는.. 진짜 외국어 쓸 일이 하나도 없다.
업무 자체도.. 내가 해오지 않은.. 또 다른 전문적인 일을 또 시작해야 하는 일이다..

이 때까지는 일을 하고 있어도.. 한편으론 꿈을 꾸고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던 날들이었다.
당연히 괴롭고 불안한 마음이 더욱 컸지만, 한 편으로는 ‘언젠가 내가 원하던 일을 할 수 있겠지’라며 미래가 조금은 기대되는 시간을 보내왔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준비되지 않았고, 원하지 않았었던 일을 새롭게 해야 한다..

이제는 ‘이제 막 사회초년생이 된 25살’이 아닌지라, 일을 시작하면 마냥 좋은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거라는걸 안다.
또 다시 스트레스를 받을거고.. 야근도 할거고.. 어느 날은 화장실에서 울기도 하겠지..
또 어느 날은 준비되지 않은 새 일을 하기 위해서 또 저녁에 공부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당장 수습을 어떻게 잘 끝내냐가 최대 관건이기도 하고..


그래서 사실은.. 좋기보다는 두렵다.
사회생활을 이미 알고 있어서, 두려움이 더욱 큰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제.. 중고 신입도 아니고.. 골동품 신입이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ㅠㅠㅠㅠㅠㅠㅠㅠㅠ




6.

4년 10개월이었다.

첫 6년 다닌 회사를 관두고.. 꿈을 향해서 마지막으로 도전하자며 준비해왔던 기간이었다.
그 중 2년 3개월은 대부분 공부에만 매달렸지만 잘 되지 않았고..
2년 7개월은 사회생활을 병행하면서 준비해왔다..

참.. 지금 생각해보면 쉽지 않은 날의 연속이었다.
그렇지만 잘 풀리지 않은 시간 속에서도.. 나를 향해 변치 않는 가족의 사랑을 느낄 수가 있었고..
직장에서 나를 지지해주는 동료애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비록 똑똑한 편은 아니었으나, 이제까지 인복은 많았던 것 같다.

사실 내가 성공하지 못한 것을 블로그에 나열하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어느덧 열심히 하는 것보다는 결과가 중요한 이 세상에서.. 나는 결국 원하던 최종 결과에 도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그치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러한 글들을 써 왔던 이유는 딱 두 가지다.
먼저.. 지금 이 순간에도.. ‘할 수 있을까?‘라며 불안해하기만 하는 또 다른 어린 김지인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준비했던거.. 좀 망해도 된다고..
꼭 모두가 똑똑하고 매일 순 공부시간 10시간 찍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잘 해내면 좋겠지만.. 설령 그렇게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비하하며 스스로 좀먹지 말아야 한다고…
인생은.. 빈 노트를 얼마나 좋은 것들로만 잘 채워나가느냐.. 라기보다는..
빈 노트를 도중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잘 완결해내는.. 한 권의 책을 쓰는 과정이라고..
그 과정이 비록 순탄하지만은 않을 수도 있고.. 힘들수도 있고.. 때로는 스스로를 탓하고.. 주변 환경을 탓할 수 있겠지만..
아무리 좋은 소설을 처음에 잘 쓰다가.. 아이디어가 도저히 생각이 안나서 도중에 미완성인 채로 끝내는 것보다는..
B급 소설이라도 본인의 올바른 신념대로 인생을 끝까지 완결해내는게 훨씬 중요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내가 15년 전으로 돌아가서 15년 전의 나한테 말해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건 사실 불가능한 일이니까.. ㅎㅎ

그리고 사실 성공 후기는 제가 아니어도 이미 다른 훌륭하신 분들이 많이들 썼습니당.. ㅎㅎ
에듀콘 때도 그랬지만.. 저는 남들과는 조금 다른 시각의 후기를 쓰는 편이라서..

그리고 두번째 이유는.. 먼 훗날, 혹시 누군가가 이 글을 보게 된다면.. 2020년대를 살아간 30대의 생애 중 하나를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이기도 하다..
뭐 이런게 유효한 데이터이겠냐마는.. ㅋㅋ
그 때까지 데이터가 남아 있겠냐마는.. ㅋㅋ
그리고 이렇게 마이너한 블로거의 글을 누가 보겠냐마는.. ㅋㅋ

이제.. 올 한 해동안 머릿 속에 잔뜩 쌓아놨던 기억들을 글로 정리했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동진 평론가의 유명 어록 중, 이런 말이 있다.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

참으로 다사다난한 4년 10개월이었다.
절대로 가까이 가지 못할거라 생각했던 꿈의 기업을 목전까지 가보기도 했고..
모든게 다 무너지는 절망적인 순간이 오기도 했지만..
’언젠가 한 번은 나한테 기회가 오겠지. 내가 비록 완벽하지는 않아도 한 번만 기회가 오면.. 그 때는 또 지금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 일어날거야.‘ 라는 마음으로 매일을 살아냈다.
나는 그래서.. 배트를 들고 경기장에 들어가는 야구선수처럼.. 내일도, 모레도, 매일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계속 나의 배트를 휘두르려 한다..
내 전체 인생으로 볼 때, 나의 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나는 언젠가 또 다시 나만의 홈런을 칠거니까.

Posted by 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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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간만에 면접 일정이 잡혔다.

최근들어 시험 준비만 하느라.. 외모를 가꿀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간만에 집에 가서 엄마한테 눈썹정리를 해달라고 했다.

엄마가 눈썹정리를 해주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30 중반에 면접 가는 딸을 위해 눈썹 정리를 해주는 엄마라니..
엄마한테 속상하진 않은지 물어봤다.
엄마는…..  너는 어렸을 때부터 남들보다 좀 느린 편이었다고.. 그러니까 괜찮다고 해주셨다.
엄마 말을 듣는데 눈에서 자꾸 눈물이 났다.
차오르는 눈물을 참으려고 했는데 소용이 없었다.

엄마는 말 없이 눈썹을 다듬다가 내 눈에 나오는 눈물을 휴지로 닦아주었다.



2.

면접을 가려면 오전 9시 반까지 서울 강남 한복판에 도착해야만 했다.
도저히 당일날 새벽에 화장하고 올라갈 자신이 없어서, 면접 전날에 짐을 싸고 한 비즈니스 호텔에 숙박을 했다.
면접장과는 불과 30분정도 되는 거리였다.

호텔에 부랴부랴 도착해서.. 근처 편의점에서 먹을걸 사고 호텔로 돌아오는데..
그래도 간만에 밖에 나왔다고 근처의 풍경을 보자니 속절없이 좋기만 했다.
그치만 호텔에서, 편의점에서 사온 음식을 우걱우걱 씹어먹으며, 아직 준비되지 않은 면접 자료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난번 면접장소에서 아이패드를 전혀 못썼던게 생각나서, 어떻게든 자료를 서면으로 갖고 있어야 계속 볼텐데.. 라는 마음밖에 없었던 것 같다.

자료가 어느정도 정리가 됐다고 생각한게 오후 10시..
호텔 프론트에 연락해서 프린트가 되는지 확인 후, 자료를 출력할 수 있었다.
밤 12시까지 가족들한테 약간의 인사와, 자료를 보느라 시간은 너무나 훅훅 지나갔다.
여전히 준비가 잘 되지 않은 것만 같아서 너무 마음이 이상했는데.. 내일 가야하니까 억지로 잠을 청했다.

침대는 푹신하고 방 안도 적당한 온도였지만,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하룻밤 새 잠에서 2~3번씩 깨다보니, 잠에서 다 깬게 오전 6시 무렵이었다.
비몽사몽하면서 씻고 부랴부랴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3.

그 날은 참으로 더운 날이었다.
5월 처음으로 해가 뜰 때의 온도가 30도가 되는 날이었다.
그 온도를 뚫고 정장 차림으로 가방과 캐리어를 끌고 면접장까지 갔다.

오전 9시 좀 넘어서 도착하고..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니..
사전에 공지된 대로 2번의 시험을 봤다.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NCS와 인성검사를 보고.. 너무 배고팠는데 12시 반부터 면접이 잡혀 있어서 밥조차 제대로 먹지 못했다.
간단히 바나나와 메추리알로 요기를 하고.. 허겁지겁 올라갔다.

첫 면접에서 1시간 반동안 또다시 자괴감이 들었던 것만 같다.
이 때까지 나름 열심히 해왔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대답을 할 때 면접관의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을 보면서..
아 망했다.. 라는 생각이 다시금 떠올랐고..
면접관이 나보다 더 나은 다른 면접자에게 더 관심을 보일 때,
아.. 진짜 망했다.. 라는 생각이 더 떠올라서 긴장감이 스멀스멀 차올랐다.

하지만 한편으론 나는 너스레를 떠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너무 초라해질 것만 같았다.
나는.. 여유가 있어보여야 하는 사람이어야 했다.
이 회사에 오는게 간절하지만, 만일 안되더라도 그냥 최소한의 자존감은 계속 갖고있어야, 이 면접 이후에도 나를 지킬 수 있을것만 같았다.
면접이 끝나도 내 삶은 계속 이어지니까.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너스레를 떨 수 있었던 원동력은.. 지금의 회사 사람들과 같이 근무해왔던 시간들이었다.



4.

그 이후에 이어진 영어 면접.
이번 면접에는 1대 1로 이뤄졌다.
면접 초반에 간단한 아이스브레이킹을 했는데, 내가 해외 경험이 없다고 대답하자, 놀란 얼굴로 진짜 해외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냐고 내게 되물어봤다.
지난 10년동안 여러 곳에서 영어도 배워보고.. 영어면접도 몇번 해봤지만.. 상대방의 그런 말에 내가 더 살짝 당황스럽고 웃음이 났다.

그래.. 예전에는 해외경험이 없어도 외국인이랑 의사소통이 된다는걸 자부심으로 느끼기도 했지..
이제는 이 나이 되도록 해외경험이 없다는게 좀 창피할 일일수도 있지..
라는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다.

그치만 참으로 실로 오랜만에 영어로 말을 하니.. 기분이 좋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는 결국 외국어를 좋아했지.. 라는 과거의 행복한 기분이 다시금 들었다.
7분이라는 시간이 마치 7초와 같았다.



5.

돌아오는 길에 서울에서 꽃을 사서 내려왔다.
마치 내 인생이 꽃다발의 꽃과 같았다고 생각했다.
24살 12월, 부산의 한국선급에서 낮 12시부터 밤 10시까지 3개의 면접을 보고..
부랴부랴 대전으로 가는 마지막 KTX의 창가에서, 창틀의 노란 조명에 비치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내가 언제 이렇게 눈가에 주름이 생겼나.. 작게 속상해할 때가 있었다.
그 때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어딘가에 면접을 보러 다니고 있고.. 당연히 내 외모는 그 때보다 더 수그러 들었으리라..
그래서.. 평소엔 스스로 나무같은 사람이 되자고 생각했지만..
그 날은 유독 내가 꽃다발로 만들어진.. 시간이 지나면 시들고야 말 존재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 꽃다발을 받아보니, 그 찰나의 아름다운 순간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찰나이기에 더 아름다운거라고.. 그냥 이 순간도 내 인생의 청춘의 한 순간인거라고..
그래서 기념하기 위해 꽃다발을 사서 내려왔다.

그 날의 bgm은 왕페이의 몽중인이었다.
5년 전, 한 밤중에 강남에 무역 교육을 들으러 갔을 때, 비오는 고속버스에서 들었던 곡이었는데..
그냥 지금 이 순간에 들으면 수미쌍관에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경삼림의 왕페이도, 결국엔 양조위를 두고 도중에 자기 꿈 찾아서 캘리포니아로 스튜어디스 하러 갔었으니까..
청춘의 꿈의 시작과 마무리에는 이 노래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6.

회사에 돌아오니, 상사 중에 한 명이 자꾸 나한테 면접을 보러 갔다오지 않았냐 물었다.
그 분도 여러차례 다른데에서 이직을 해오신 분이고, 평소에 나한테 응원을 해주셨기에 순순히 그랬다고 대답했다.
잘 봤냐 물어보기에, 잘 보진 못했지만 열심히는 했다고 대답했다.
나한테 또 다른데는 면접 본 데는 없냐고 물었다.
다른데는 아직 필기 통과도 어렵다고 이야기 했다.
내 앞에서 ”왜 안되지“라고 하는데 순간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자신없어 하는 모습때문에 잘 안되는게 아니냐며, 나한테 뭐라 말했다.

정작 나는.. 이번 면접에는 승패는 크게 상관이 없었는데..
그냥.. 끝을 낼 수 있어서 좋았다는 뿌듯함과, 이거면 됐다는 만족감이 컸었는데..

그걸 겪고 나서.. 아무리 응원을 받아도, 이제는 더이상 내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른사람한테 함부로 섣불리 이래라 저래라 하질 않는데,
왜 타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지 모르겠다.

내 삶을 대신 살아보지도 않았으면서.
내가 작년과 이번 면접까지 어떤 마음으로 임했고.. 지금은 또 어떤 마음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 사람을 비롯한, 내게 한마디씩 얹는 사람들은 알까?
그들이 말하는 작은 한마디가.. 나한테는 얼마나 비수가 되어서 마음에 꽂히는지..
본인들의 의도가 나쁜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도.. 내가 느끼기에 아프면 아픈거잖아.



요즘은 그냥.. 잘 모르겠다.
사실 이제는 뭘 새로 할 힘도 없다.
내 시간을 너무 허무하게만 쓴 것만 같아.

나는 앞으로 인위적으로 뭘 아등바등 하려고 하지는 말아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내 뜻대로 안되는 인생.. 그냥 힘이 빠지면 파도를 타고 돌아다니는 해파리처럼 살아야지..

나는 해파리다.

Posted by 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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